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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잡을 수 없이 완전한’ ‘공정 경쟁’ 체제는 무엇을 해결할 수 있는가?

‘새로운소통연구소’가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대 청년들에게 국민의힘의 이준석 당대표가 ‘공정 경쟁’을 상징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이준석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위한 ‘할당제’가 공정 경쟁을 저해한다며 반대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최근에 여성에게만 특혜를 주는 ‘여성가족부’를 폐지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준석 이전에 ‘공정’을 사회적 화두로 끌어올린 이는 법무부장관을 지낸 조국이다. 조국의 아내 정경심 교수는 딸의 입시비리와 관련해 재판을 받고 있다. 이 불공정 시비는 20대 청년들이 민주당으로부터 이탈하게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강력한 대선 후보들인 이재명과 윤석열도 ‘공정’에 대해 한마디씩 거든다. 그리고 각자 자신이 가장 ‘공정’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먼저 ‘공정’ 시비를 붙인 사람들이 있다. 2019년 인천국제공항공사(이하 인국공)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회사로의 정규직화에 반대하며 온전한 정규직화를 요구했을 때, 인국공의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에 반대했다. 자신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정규직이 되었는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정규직이 되려 한다며,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올해 들어서는 건강보험공단(이하 건보공단) 고객센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인국공에서 벌어졌던 일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건보공단의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요구에 반대한 것이다. 인국공 정규직 노동자들과 같은 이유에서다.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공정을 원하는가?

▲ 국민건강보험공단 정규직의 시위트럭에 적힌 고객센터 노동자 직고용 반대 메시지 @연합뉴스


자신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수년씩 공부해서 100: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왔는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정규직 일자리를 거저 달라고 하니 이런 요구가 ‘공정’하지 못한 일로 여겨질 만도 하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생존경쟁은 무지막지한 노력을 요구한다.)
권력자의 입시비리에 분노하는 20대 청년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바늘구멍같은 취업문을 돌파하기 위해 100:1이 넘는 엄청난 경쟁률 뚫어야만 하는 이들의 처지에서 보면 입시비리는 확실히 분노할 만한 불공정한 일이다. 그런데 인국공이나 건보공단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요구가 과연 ‘공정 경쟁’의 규칙을 깨뜨리는 분노할 만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좀 더 따져봐야 한다.  
인국공이나 건보공단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이 된다고 기존의 정규직 노동자들의 지위나 보수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기존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직장 내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뉘어져 신분과 처우에 차별을 받는 것에서 오는 위화감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더 좋은 일일 것이다.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마치 하인 다루듯 하는 일부 시답잖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배가 아픈 일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인국공과 같은 공사에 들어가기 위해 도서관이나 학원, 고시촌 쪽방에 틀어박혀서 열공하고 있을 취준생들에게는 좋은 일일 수도 있다. 비정규직 일자리가 정규직 일자리로 전환되면 그만큼 정규직으로 취업할 기회가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화된다면, 취준생들이 더 안정되고 더 보수가 좋은 일자리에 취업할 기회가 그만큼 확대될 것이다. 이것이 과연 ‘공정’을 해치는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공사에 입사한 ‘똑똑하신’ 정규직 노동자들은 실제적으로도 훨씬 이롭고, ‘공정 경쟁’을 해쳤다는 어떤 근거도 없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했다. 그리고는 ‘공정해야 한다’는 ‘도덕’을 앞세웠다. 이 ‘공정’의 ‘도덕’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에 장애물이 되었다. 이로부터 이득을 얻는 이들은 더 적은 비용으로 계속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부릴 수 있는 정부와 공사의 경영진들이다. 
그런데 왜 공사에 입사할 만한 똑똑한 머리를 가진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런 간단한 셈조차 하지 못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생각나게 할 만큼 지독한 쫌생이로 만들었을까? 그들은 대체 어떤 ‘공정’을 원한 것일까?
 

치열한 생존경쟁 체제


자본주의 사회는 생존을 위해 개인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회다. 이 사회는 사람들을 가장 높은 위치에서 가장 낮은 위치까지 서열화시킨다. 맨 꼭대기 층에 대자본가들이 있다. 이들은 사회의 주요 생산수단들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은 생산수단을 이용해 사회적 부의 상당 부분을 빨아들인다. 오늘날 대자본가 되는 것은 거대한 재산을 그들의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이윤체제를 지탱하기 위해 사회의 가장 ‘똑똑하고 재능있는’ 자들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이들에게 괜찮은 보수를 지급한다. 부모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부릴 만한 재산을 상속받지 못한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통해서 대자본가에게 고용되어야 한다. 그/그녀는 전문경영인이 될 수도 있고, 이사, 부장, 과장, 연구원, 전문기술자가 등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나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그/그녀는 자신이 그런 보수를 받을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검증의 주체는 대자본가들이다. 대자본가들이 필요로 하는 능력은 다양하다. 그것은 지식일 수도, 경영능력일 수도, 과학적 탐구 능력일 수도, 이러저러한 다양한 기술에 관한 능력일 수도 있다. 어쨌든 재산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대자본가가 필요로 하는 능력들을 계발해야만 한다.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계발할 기회를 얻지 못한 불운한 이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이들이 자신의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재능을 대자본가에게 비싸게 팔려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한편으로 대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이윤체제를 지탱하기 위해 국가권력과 국가기구가 작동한다. 전체 자본가들의 이윤체제를 보조하기 위해 국가에서 직접 기업을 운영하기도 한다. 이곳에서도 괜찮은 보수와 안정적인 일자리를 두고 대기업에서와 같은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이런 치열한 생존경쟁이 자본주의 사회의 밑바닥으로 향하는 연관 사슬 속에서, 곧 대기업의 하청기업에서, 국가의 하청업체들에서, 숱한 이러저러한 중소기업들 차원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항상 재산(생산수단)을 가진 이들은 못 가진 이들을 서열화시키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능력을 산다. 재산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보수가 괜찮고 고용이 안정된 쓸 만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재산이 있는 이들의 이윤증식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렇게 경쟁이 불붙는다. 재산을 가진 이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하찮은(?) 능력을 가진 이들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최저임금과 실업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치열한 생존경쟁은 그치지 않는다. 

똑똑한 인국공과 건보공단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런 자본주의 체제의 치열한 경쟁의 압력 앞에서는 무력한 개인들일 뿐이다. 그/그녀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자연의 섭리쯤으로 생각하게 된다. 비록 대단히 명석하지만 무력한 개인들이 거대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착취와 경쟁’의 시스템에 도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그녀들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한 치열한 생존경쟁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그녀들은 바늘구멍을 통과한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것이 지나쳐서 그/그녀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능력이 없는,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로 치부하고 업신여기는 데까지 나아간다. 여기서 그/그녀들의 공정론이란 ‘숙명과 오만’의 혼합물인 것이다.

완전한 ‘공정’

▲ 평등, 공평, 현실, 해방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생존경쟁 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높은 사회적 지위와 더 많은 보수를 얻기 위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능력주의’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재산의 정도나 권력 등 사회적 배경이나 외압 없이 온전히 개인의 능력만을 평가해서 사회적 지위와 소득을 분배해야 한다는 ‘온전한 공정론’이 등장하는 것도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역으로 ‘온전한 공정론’이 등장한다는 것은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자본가들과 권력자들은 정규직 일자리를 비정규직 일자리로 만들고, 더 적은 보수를 지급하려고 한다. 이미 비정규직 일자리가 전체 일자리의 절반을 넘어섰다. 이런 일들은 정부와 자본가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침체되면서 이런 사회적 변화는 점점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 때문에 보수가 괜찮고 고용이 안정된 쓸만한 일자리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자본가들과 권력자들은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 위기가 초래한 이윤율 하락에 대응하고 있다. 
그래서 대기업이나 공사의 정규직, 정부기관의 공무원 등의 쓸만한 일자리를 두고서 능력자들의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다. 경쟁이 심화될수록 ‘공정’에 대한 시비도 더 격렬해지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입시부정에 그토록 많은 취준생들이 분노하는 것도 이런 사회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국민의힘의 이준석과 같은 이가 ‘공정’ 시비에 가담해 청년들의 분노를 대변하면서 거대정당의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일이 일어나는 것도 이런 사회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완전한’ 공정


그런데 개인들을 능력에 따라, 어떤 잡음도 일어나지 않게 ‘완전히’ ‘공정하게’ 일자리와 사회적 부를 분배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까? 완전히 공정한 규칙에 따라 사회의 맨 꼭대기에서 가장 밑바닥까지 능력에 따라 개인들을 줄세워서 개인들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지위와 보수를 얻게 하면 아무 문제도 없게 될까? 그렇게 하면 사회적 부가 부자들에게 더 집중되고 가난한 이들이 더욱 가난해지는 부의 양극화가 조금이라도 해소될까? 하찮은 능력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서 비정규직이 되어야 하는 노동자들, 최저임금을 받아야 하는 노동자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실업자들이 사라질까? 

대자본가의 자식들은 거대한 재산을 물려받는다. 이들이 재산을 물려받지 못한 대다수의 능력을 측정하는 기준을 세우고, 그에 따라 능력을 측정하고, 그들을 서열화시킨다. 그리고 더 나은 보수를 얻을 자들과 겨우 생존에 필요한 쥐꼬리만 한 보수를 얻게 될 자를 나눈다. 다수에게 이 영역은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넘본다고 다가갈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아무리 공정한 규칙을 세운다고 하더라고 개인들의 능력이 아무리 하늘을 찌른다고 하더라도, 그 노력이 하늘을 감동시킬 만큼 대단한 것이라 하더라도 거대하게 집중된 사회적 부인 거대한 기업을 개인들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획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쟁의 규칙을 아무리 완전하게 그리고 공정하게 만들어도 그런 종류의 사회적 이동, 신분의 상승은 불가능하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재용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은 세상을 주관하는 섭리요, 신의 영역인 셈이다. 
경쟁에 뛰어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주관자의 섭리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도 출발선은 제각각이다. 물려줄 재산이 변변찮은 이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 쏟아 붓는다. 어학연수, 과외, 각종 스펙 쌓기, 내신관리, 유학 등. 힘 있는 자들은 스펙을 위조하고, 압력도 넣는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처럼 말이다. 이런 것들을 엄두도 낼 수 없는 가난뱅이 노동자의 자식들은 어쩔 수 없이 맨 뒤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이들만이 가장 공정한 출발자들인 셈이다. 그러나 가장 공정한 출발자들이 가장 뒤쳐진다. 어쨌든 애초 가진 것이 다른 이들의 출발은 공정을 천만 번 외친다고 하더라도 결코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고를 방법은 없다. 그렇게 하려면 권력과 부를 완전히 평등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런 세상은 더 이상 자본주의가 아닐 것이다.
 
이런 경쟁의 결과는 모든 것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좀 더 가진 집 자식들은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성공의 사다리에 올라탈 가능성이 훨씬 높다. 반대로 가난뱅이의 자식들은 다시 가난뱅이가 된다. 사회적 이동, 신분의 상승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면 그럴수록 공정에 대한 외침은 높아져 간다. 국가가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부여될 수 있도록 교육과 양육 등에 더 많은 재정을 쏟아야 한다는 주장들이 속속 등장한다. 그러나 ‘공정한 경쟁’을 위한 규칙을 만들어서 ‘기회의 균등’을 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아무리 높아져도 부의 불평등을 없애지 않는 한 기회균등을 위한 공정한 규칙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부자들의 자식들은 다시 부자가 되고 가난뱅이 자식들은 다시 가난뱅이가 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자본주의 경제위기가 더욱 심화되면서 어느 나라나 사회의 복지가 점점 후퇴하고 있다. 일자리의 질이 하락하고 일자리도 점점 줄고 있다. 그런데 ‘능력주의’에 따른 ‘공정 경쟁’의 논쟁은 이런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공정 경쟁과 개인들의 능력’의 문제로 돌리게 한다. 그리고 개인들의 행운과 불행을 모두 개인들의 책임인 것으로 간주하게 한다. 성공의 사다리를 밟고 올라간 자들은 자신들의 부와 지위가 자신들이 능력과 노력에 부응하는 마땅히 받을 만해서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편으로 경쟁에서 밀려난 능력이 하찮은(정말로 하찮은 지는 더 따져볼 일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가망 없는 삶이 자신들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이 이 경쟁체제를 지배하고 있고, 경쟁의 규칙을 만드는 이들이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에 열심히 호응하는 이유다. 이준석이나 윤석열이나 이재명 같은 정치권력의 맨 꼭대기에 있는 이들이 ‘공정’의 화두를 꺼내 들어 아무것에나 ‘공정’을 덧붙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완전한 공정과 완전한 기회의 평등’은 결코 달성될 수 없는 허구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온전히 공정한 규칙을 통한 기회의 완전한 평등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부의 불평등을 단 1도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불평등과 그런 불평등을 낳은 사회를 정당화할 뿐이다. 모든 책임을 개인들의 ‘노력 부족’과 ‘능력 부족’ 탓으로 돌리면서 말이다. 인국공이나 건보공단에서처럼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와 단결을 깨뜨리면서 말이다. 

다른 세상은 가능한가?


그러면 다른 세상은 가능할까? 가정해보자. 다수의 평범한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하여 생산수단, 지금은 소수의 자본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생산수단을 다수의 가난하고 평범한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체제가 들어섰다고 가정해보자. 
이 체제에서는 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일할 능력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다. 일자리가 부족하다면 노동시간을 줄여서 일자리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받을 보수는 그들이 일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사실 인국공이나 건보공단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는 일은 별로 특별할 것도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는 일과 다를 것이 없다. 사무직 노동자들이 가진 능력이라고 해서 특별할까? 그런 능력은 누구나 학습과 경험을 통해 충분히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경제를 관리하는 노동자국가에서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누구나 번갈아 가며 수행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냉장고, 텔레비전, 자동차, 핸드폰, 이러저러한 서비스, 교육과 양육,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은 어떤 질적 차이도 없게 될 것이다. 이 모든 노동이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이상 이들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다. 노동자 국가는 이런 원칙을 그대로 사회 시스템화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수가 있을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찬가지로 노동자국가는 그/그녀들의 재능을 충분히 활용할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노동자들의 권력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이들에게 결코 특별한 보수를 지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노동에 대한 보수도 오직 그들이 수행한 노동의 시간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보상이 있다면 그것은 다수의 노동자들을 위해 그/그녀가 아주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사회에 봉사하고 있다는 ‘명예’ 정도일 것이다. 더 높이 올라갈 곳도 없고, 더 많은 보수를 챙길 방법도 없다. 그러나 그/그녀가 원한다면 그/그녀는 연구실에서 연구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노동자 국가가 지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연구 결과는 이윤이 아니라 노동자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의 물질적 정신적 풍요를 위해 쓰일 것이다. 물론 그/그녀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한 경쟁에 자신의 열정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그/그녀가 몰두해야 할 것은 그/그녀의 재능을 충분히 살리고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노동자 국가에서 개인과 사회가 맺는 유기적 관계다.  
사회는 개인들의 능력을 계발하고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경쟁적 요소를 도입하겠지만, 그 경쟁은 더 이상 생존경쟁이 아닐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더 이상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공정’한 규칙 같은 것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런 생존경쟁 자체가 점점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는 자신의 능력만큼 일하고 일한 만큼 보수를 받게 될 것이다. 물론 이 보수 중에서 공공사회의 필수적인 재원을 위한 세금은 공제될 것이다. 출발선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그러나 그/그녀가 도달해야 하는 목표는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실현하는 것, 그것을 통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훨씬 풍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 사회를 주관하는 것은 전체 노동자계급일 것이며, 그들이 확립한 사회 시스템이 자연의 섭리처럼 모든 사람들의 의식 속에 파고들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자본가들이 이윤체제를 지탱하기 위해 주관하는 경쟁시스템이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섭리처럼 모든 사람들의 의식 속에 파고드는 것처럼 말이다. 주관자가 바뀌면 세상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영원하지 않다. 생존경쟁은 영원히 변치 않는 섭리가 아니다. 오히려 생존경쟁은 아직 사회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의 증표일 뿐이다. 그런데 경쟁사회인 자본주의 사회를 지양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그들만이 경쟁과 분열이 아니라 단결함으로써 이득을 얻고 사회를 발전시킬 협력의 에너지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할 수 있을 때, ‘공정’에 대한 모든 헛된 열망도 사라질 것이다. 

 

김정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