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 당사자만의 문제일까?
산업재해라고 하면 흔히 산업현장에서 사고를 당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추락, 협착, 폭염, 질식 등이 있다. 이렇게 사업장에서 즉시 죽거나 다치는 산재사고도 일어나지만 일하면서 얻은 질병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산업재해도 있다. 노동자 당사자가 업무 중 여러 유해 화학물질이나 환경에 꾸준하게 노출되면서 직업병에 시달리는 경우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노동자의 성별이 여성일 경우, 특히 그 여성이 임신 중이었다면 산업재해가 당사자에 그치지 않고 재해가 대를 이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제주의료원 태아 산재 사건
2020년 4월 29일, 의료연대본부와 제주 의료원 노동조합이 ‘태아 산재’를 대법원으로부터 처음으로 인정받았다. 10여년간 투쟁을 해온 결과다. ‘제주의료원 태아 산재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2009-2010년 임신한 제주의료원 간호사 15명 중 5명은 유산, 4명은 선천성 심장 질환을 가지고 태어난 사건을 말한다. 한꺼번에 일어난 이 비극을 두고 간호사들은 업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의심했다. 노동조합은 농성에 들어갔고 제주의료원 측에서는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역학조사를 맡겼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생식 독성물질 등급이 가장 높은 단계(A,B,C,D, X 단계로 나눠짐)의 약물을 병원에서 계속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이 조사에서 밝혀졌다. 병원은 임신한 간호사들이 미국 식품의약처(FDA)에서도 기형아 발생을 이유로 임산부에게 금지된 약물을 다루도록 한 것이다. 거기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닿아서는 안 되는 위험한 약물까지 있었다.
제주의료원의 경우 공공의료원으로 주로 고령의 장기 입원환자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먹기 좋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 약물을 절구에 직접 빻아서 제공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 업무를 간호사들이 직접 했다. 업무를 수행하면서 발생되었던 분진가루를 마셨고 이것이 태아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간호사들의 비극이 업무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제주의료원은 경영상 적자라는 이유로 대거 인원감축을 했다. 그에 따라 업무의 강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간호사들은 당시 야간교대 근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달에 10차례나 이루어졌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임신한 간호사들이 병원 내의 병실을 뛰어다니면서 강도 높은 일을 처리해왔던 것이다. 이 모든 상황들이 켜켜이 쌓여 ‘태아산재’가 발생했다.
10년간의 투쟁
유산된 간호사와 선천성 심장 질환을 가진 아기를 낳은 간호사들이 모여서 2012년 근로복지 공단에 산업재해 신청을 했으나 유산된 간호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승인 되었다. ‘아이가 죽어야만 산재인 것이냐’라며 분노한 나머지 간호사들 4명이 행정소송으로 돌입했다. 소송에서 쟁점이 되었던 것은 ‘산모와 태아가 한 몸인지 아닌지’ 여부였다.
1심에서는 임신 중에는 산모와 태아가 하나의 몸이라고 인정하면서 임신 당시 업무 중에 태아에게 발생한 건강손상은 노동자에게 발생한 것으로 업무상 재해로 봐야한다고 승소를 내렸다. 그런데 2심에서는 이것을 완전히 뒤엎었다. 산재 보험 급여를 수급하려면 당사자 외에는 인정할 수 없다면서 산모와 태아는 분리할 수 있고 선천성 질병은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고 판결내린 것이다. 태아는 수급권자로 인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는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손을 들어줬다. 엄마의 업무에 기인한 태아의 건강손상이 출산 이후 태아의 선천성 질병 등에 관하여 요양 급여 수급권을 부여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2심 판결을 뒤집고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포기하지 않고 싸워온 간호노동자들의 승리였다.
이 판결은 태아의 건강손상을 산재로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다. 노동자 당사자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산재보험법상 요양급여의 보장 범위를 자녀의 치료를 위한 의료 서비스까지 확대하였다는 데에 충분한 의미가 있다.
승소한지 1년이 지났지만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후속적인 구체적 방안은 나오고 있지 않다. 치열하게 투쟁해서 권리를 쟁취해냈지만 그것이 최초라는 이유로, 정확한 기준이 없다는 이유로 실질적인 보상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태아 산재’ 법이 없으니 보상이 어렵다는 게 이유이다. 이어 ‘다른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문제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서울고등법원이 태아 산재를 부정한 판결의 근거인 산재보상보험법의 시급한 개정이 필요하다’면서 ‘태아는 노동자가 아니라서 산재보상보험법의 수급자가 될 수 없다’는 현실에 뒤떨어진 산재보상보험법을 즉각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법을 개정하라는 요구를 끊임없이 하고 있으나 아직 국회에서는 이 요구에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이 법이 개정되고 나서도 사회와 싸웠던 제주 의료원 간호사들, 그리고 투쟁하는 엄마 옆에서 병마와 싸웠던 자녀들이 이 법을 적용받을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국회의원들이 내놓는 법개정 안에는 특정 시점 이후 출생 자녀들에게만 한정하는 내용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이전에 발생했던 사건들에 대한 산재 소급 적용 여부, 보험 급여 지급 범위의 제도화, 부계 쪽의 생식이상 문제 적용 등을 두고 아직도 논의가 분분하다.
그리고 ‘자녀 돌봄 휴업 급여’ 부분도 개정안에 포함되어 있다. 자녀 간병을 위한 부무의 휴업 급여를 보장하자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법안 통과는 미지수이다. 통과 된다 하더라도 이미 자녀들이 커버린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은 소급 적용문제부분에서 얼마나 어떻게 적용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앞으로 일어나게 될 많은 태아 산재 사건들 모두 제대로 적용받을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그러는 동안 아픈 노동자들은 더 버티고 생사를 오가는 살얼음판 위에서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혼자만을 위한 싸움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에서 법개정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대법원 승소를 끌어내는 투쟁에 이어, 판례를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죽지 않고 일할 권리’는 더 넓게 포용되어야 한다
제주 공공의료원은 이윤을 이유로 적자가 나는 예산이라며 의료용 제분기를 마련하지 않았다. 해당 기계를 대신해서 사용하라고 했던 믹서기는 일반 가정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믹서기를 사용했다고 해도 뚜껑을 열면서 한 번에 분진가루를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사용이 용이하지 않아서 대다수의 간호사들은 손으로 약을 제조했다고 한다. 적어도 간호사들이 직접 약을 빻거나 정제하지 않았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기계값은 2천 만원 정도 였다.
그래도 지금은 최소한의 보호 장치로 장갑, 분진 마스크나 안전 보호장비를 갖춰 입고 작업을 한다고 한다. 간호사들의 투쟁으로 현장을 조금이나마 바꿔낸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안전책과 예방책이 필요하다고 간호사들은 말한다.
제주의료원에서 벌어진 일이 과연 제주의료원에만 해당하는 일일까. 전자산업에서는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고 생식독성이 강한 유해 물질들을 다룬다. 산업별로 지속적인 소음노출에 의한 소음성 난청, 한가지 작업만 지속적으로 하면서 나타나는 다양한 근·골계질환, 먼지와 분진가루를 끊임없이 마셔야만 하는 작업들, 주·야간 맞교대로 인한 발암물질 노출 등은 조용하게 노동자들을 병들게 한다.
산업재해라는 단어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당사자의 병은 업무와의 연관성이 희미하게라도 보인다면 개연성이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을 정확하게 사업주에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제대로 된 처벌과 예방책을 마련해야 한다. 세대를 이어 일어나는 비극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노동자들이 겪은 수많은 사건들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제주 의료원 태아 산재 사건의 비극은 앞으로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노동을 하고 살아가는 모든 노동자들이 죽지 않고 일할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자본가의 탐욕에 의해서 노동자의 건강이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된다.
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