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역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 영유아 동반자, 다리를 다친 사람 등 높은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엘리베이터는 매우 유용한 시설이다. 이동약자가 아니더라도 무거운 짐을 들거나, 캐리어를 끌거나, 시간이 촉박한 사람들도 이용한다. 이 편리한 엘리베이터가 누군가에게는 선택의 문제지만 누군가에게는 필수가 된다. 엘리베이터 없이는 지하철에 접근할 수 없는 이들, 바로 신체장애를 가진 이들이다.
죽음으로 쟁취한 이동권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지하철역 엘리베이터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장애인 이동권을 쟁취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결과물이다. 2001년 경기도 시흥 오이도역에서 리프트가 끊어져 한 명이 목숨을 잃고 한 명은 크게 다쳤다. 이 사건으로 장애인들은 위험한 리프트 대신 엘리베이터 설치를 요구하며 투쟁했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2002년 서울 강서구 발산역에서 리프트가 추락해 또다시 한 장애인이 목숨을 잃었다. 더 이상 죽을 수 없다며 장애인들은 지하철 선로를 점거한 채 쇠사슬로 몸을 묶고, 30일이 넘게 단식 농성을 하는 등 목숨을 건 투쟁을 벌였다. 그 결과 2005년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이후 교통약자법)이 제정되었다. 눈물 젖은 결실이었다.
지켜지지 않는 약속
법제정 이후 15년이 지났지만 작년 연말부터 장애인들은 또다시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투쟁에 나섰다. 법은 있으나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재임 당시 서울시는 2004년까지 지하철 1역사 1동선(출구에서 승강장까지 교통약자가 리프트가 아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이동 가능한 동선)을 100%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박원순 전 시장은 2022년까지 100% 설치를 약속했다. 하지만 2022년 현재 서울지하철 283개 역 중 22개 역에는 아직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았다. 심지어 올해 서울시 예산안에는 해당 예산이 빠져 있다. 서울시는 일정을 늦춰 2024년까지 설치를 완료하겠다고 했지만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승강장 안전 역시 문제다. 지하철 1~8호선 전체 승차 위치 1만9256개 중 열차와 승강장 사이 간격이 10㎝를 넘는 곳이 3398개에 달한다. 20㎝에 달하는 곳도 있다. 안전 발판을 설치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으나, 지하철 1~8호선은 관련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건설돼 강제사항이 아니라는 이유로 방치되어 있다. 이윤 앞에 안전이 뒷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인 버스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15년 동안의 저상버스 도입률은 27.8%에 불과하다. 그것도 일반시내버스가 대부분이고 광역버스나 마을버스는 저상버스를 찾아보기 어렵다. 지역에 따른 편차도 커서 충남의 경우 10%만이 저상버스로 운행되고 있다. 저상버스가 가장 많은 서울시조차 도입률이 57.8%에 불과하다. 2020년까지 40%, 2025년까지 100% 저상버스를 도입하겠다는 목표에 훨씬 못 미치는 숫자다. 저상버스 도입이 의무화가 아닌 지자체 및 운수 사업체의 재량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작년 연말에 교통약자법이 개정되면서 2023년 이후 노후 시내버스 교체시 저상버스 도입을 의무화하는 내용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시외버스는 아예 저상버스 도입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심지어 올해 2월 대법원은 장애인의 시외이동권을 전면 부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시외버스의 휠체어 승강설비 설치 책임이 버스업체, 지자체, 정부 모두에게 없다는 것이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이동의 자유를 제한당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인데 이를 차별로 볼 수 없다는 법원의 논리가 무색하다.
대중교통이 아닌 장애인콜택시와 같은 특별교통수단은 상황이 나을까? 그렇지 않다. 교통약자법에서는 장애인콜택시 운행 대수를 중증장애인 150명당 1대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법정 운행 대수를 지키는 광역지자체는 서울특별시, 경기도, 세종특별시, 경상남도, 제주도 등 5개 지역에 불과하다. 충북과 인천은 50%를 겨우 넘는 수준이다. 심지어 충북 보은군의 경우 장애인콜택시를 한 대도 운영하고 있지 않다. 법정 운행대수를 지키는 지역에서조차 콜택시를 타려면 1시간 넘게 대기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신청을 해도 언제 배정될지 기약이 없다. 학교, 직장, 병원 등 시간을 지켜야 하는 약속을 위해 콜택시를 이용했다가는 시간을 어기기 일쑤다. 게다가 지자체에 따라 이용대상, 운영방식, 비용도 다 제각각이고, 타지역으로 이동도 불가능하다.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왜 이동권인가?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단순히 ‘이동의 권리를 보장하라’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이동권이 제한되면 교육을 받는 것도, 노동을 하는 것도 제약을 받는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친구나 가족을 만나는 등 최소한의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어렵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삶이 몽땅 다 제한되는 것이다. 최근 장애인들이 이동권 보장 투쟁의 일환으로 출근 시간에 지하철 운행을 중지시키자 비장애인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그 잠깐의 이동권 제한에도 비장애인들의 일상이 엉망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일생의 대부분을 이동권을 제한당하는 장애인들의 삶은 어떨까? 이것이 이들이 힘든 조건에서도 이동권 쟁취를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모두를 위한 권리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시설들을 만드는 것은 다만 장애인들에게만 유용한 것이 아니다. 전국민 10명 중 3명이 장애인, 고령자, 어린이, 영유아동반자, 임산부 등 교통약자에 해당한다. 적지 않은 숫자다. 게다가 앞으로 노인인구의 비율이 급속히 늘어날 상황에서 앞서 본 엘리베이터의 사례처럼 교통약자를 위한 시설은 결국 모두를 위한 시설인 것이다.
배리어 프리(barrier-free : 장애물 제거)라는 용어가 있다. 장애인, 어린이,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게 물리적인 장애물, 심리적인 벽을 제거하자는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다. 턱을 없애고,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도 배리어 프리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배리어 프리가 일상화되면 나이나 신체능력, 건강상태 등 개인의 조건과 상관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접근하고 제약없이 생활할 수 있게 된다. 누구나 함께 누릴 수 있는 시설이 늘어난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윤이 먼저인 사회
장애인 이동권은 왜 계속 가로막히고 있는가? 비용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윤추구가 목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 약자는 생산성이 낮은 반면 비용이 많이 드는 존재로 인식된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면 독일의 7살짜리 아이들을 대상을 하는 시험문제로 〈장애인에게 하루 평균 4마르크의 돈이 들고 환자가 30만 명이라고 가정할 때 이들을 모두 제거하면 얼마의 비용을 아낄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내용이 나온다. 끔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셈법은 영화적 가정이 아닌 자본주의 사회의 계산법이다. 효율성과 기회비용을 따지고,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이익을 얻어야 하는 자본주의식 셈법 앞에 장애인들의 삶의 권리는 쉽게 무시된다. 하지만 누가 이들에게 이익을 벌어다 주었는가? 장시간 노동과 위험한 작업환경으로 산업재해의 위험에 시달리면서도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은 일하다 디스크가 나가고 근육이 파열되고, 뼈가 부러지고, 손발이 잘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다친 노동자들이 장애인이 되면, 자본가들은 그들이 더 이상 자신들에게 벌어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불량품으로 취급한다. 이들이 나이가 들면 또 어떤가. 정치인들과 언론은 고령화로 인해 사회적 비용이 늘어난다고 떠들어댄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 요구가 소수만이 혜택을 보는 이기적인 요구가 아니라 다수의 편의를 향상시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요구는 비용이라는 벽에 끊임없이 가로막힌다.
장애인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사람은 누구나 어린아이 시절과 노인의 시절을 거친다. 일하다 다칠 수 있고, 병을 얻거나 장애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장애 자체가 아니라 장애를 대하는 사회의 태도다. 이들을 사회의 일원으로서 함께 살아갈 당연한 존재로 인식하는가, 아니면 귀찮고 비용만 낭비하는 불편한 존재로, 혹은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인식하는가에 따라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진다. 대부분의 노동자 서민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과 가족의 일생을 책임질 만큼의 경제적 능력을 가질 수 없다. 개인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에서는 장애를 가진다는 것, 사회적 약자가 된다는 것은 생존을 위협하는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가 존재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있다. 출생에서 사망까지 국가가 개인의 삶을 책임진다는 말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저한도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전체 구성원의 삶은 풍요로워진다. 가난하고 아프고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이들의 삶이 안전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사회구성원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재화를 이용하면 된다. 자본을 소유한 소수 자본가들이 전체 사회의 재화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만들면 된다. 불가능한가? 혹은 불필요한가? 아니다. 모두가 함께 자유롭고 행복하게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는 가능하다. 장애인 동지들의 투쟁이 그 날을 앞당길 것이다.
권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