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엠창원비정규직지회(이하 창원비지회)에서 발생한 이 배신적 행위는 왜 일어나게 되었을까? 한때 창원비지회의 전투적이고 원칙적이던 전 지회장 ‘김**’의 행동은 평범한 조합원의 눈에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채용원서를 내지 않고 지도부의 지침을 사수한 조합원들은 ‘김’에 대한 배신감에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운동의 원칙 ①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단결
‘김’은 한때 사회주의자였다. 지금도 그는 자신이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노동자투쟁〉이라는 사회주의(?) 정치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김’이 저지른 일은 사회주의 원칙은커녕 노동조합 수준의 원칙조차도 위배한 반노동자적인 행동이다. 그런데도 ‘김’은 여전히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여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사상이다.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본가계급에 대항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하나의 계급’이라는 공통의 의식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래서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운동은 ‘하나의 계급’이라는 목표 아래 항상 ‘단결’을 지향한다.
그런데 ‘김’은 노동자의 단결을 왜곡된 방식으로 이해했다. 노동자들 각자가 개인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단결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년 12월 한국지엠 자본은 창원공장의 비정규직 노동자 500여 명을 해고시키려 했다. 사측의 해고는 매우 부당했고,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해고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 비조합원을 중심으로 일부 노동자들은 자본의 힘이 더 커 보이고, 해고를 막기도 어려워 보이니 위로금이라도 더 받기를 원했다. 당시 ‘김’은 비조합원들을 모으기 위해 해고 반대가 아니라 위로금을 더 받기 위해 싸우자고 선동했다. 해고를 반대하는 이들과 위로금 받고자 하는 이들이 함께 싸우면 단결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연말까지 투쟁을 이어간 것은 위로금에 관심이 있었던 다수의 비조합원들이 아니라 해고 반대를 외쳤던 조합원들과, 해고 반대 투쟁에 동의했던 30여 명의 비조합원들이었다. 위로금을 원했던 노동자들은 사측이 던진 위로금 한 방에 우수수 투쟁대열에서 이탈했다. 위로금을 받는다는 것은 해고를 인정하는 것이고, 해고 반대와 대치되는 요구이다. 하지만 ‘김’은 서로 부딪히는 이 모순된 요구를 하나로 뭉쳐 요구하면 양쪽 의견을 가진 이들을 모을 수 있다는 망상에 빠졌다.
그리고 이 망상은 최근 더욱 해로운 방식으로 다시 등장했다. 올해 3월 한국지엠 사측의 요구로 불법파견 문제 해결을 위한 교섭이 진행되었다. 사측은 현재 재직 중인 1차 하청 인원 중 직접생산 공정에 근무하는 260명 가량을 정규직으로 신규 채용하는 안을 제시했다. 노동부가 직접고용을 명령한 인원만 해도 1,719명인데 사측은 해고된 노동자들, 간접부서 및 2차·3차 하청업체 비정규직들을 모두 배제한 안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비정규직지회는 받을 수 없는 안이라고 거부했다. 그런데 ‘김’은 사측의 발탁채용 예정자인 260명의 더 나은 고용조건을 위해 교섭을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고자들의 정규직화 요구와 260명 고용조건을 함께 교섭의 요구조건으로 제기하면 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사측은 260명 신규채용안을 받지 않으면 채용조건에 대한 논의는 불가하다고 못박았다. 260명의 정규직 채용으로 불법파견 문제를 덮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런데도 ‘김’은 모순되는 두 요구를 병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무조건 교섭을 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현실을 무시한 망상에 기반한 주장이었다. 심지어 ‘김’은 현 집행부가 대법판결만 기다리면서 교섭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악선동을 벌였다. 칼끝은 사측이 아닌 내부로 겨눠졌다. 사측의 기만을 폭로해야 하는 중요한 투쟁의 시기에 내부 논쟁으로 너덜너덜해졌다.
‘단결’을 주장하며 ‘단결’을 파괴해온 ‘김’의 망상적 주장은 결국 반조직적 행동으로 노조에 치명타를 입혔다. 사측의 전화를 받은 ‘김’이 지회의 입장에 따라 신규채용을 거부한 15명의 조합원 자리에 조합원들이 들어가도록 조직한 것이다. 게다가 〈노동자투쟁〉 조직은 ‘김’의 행동을 합리화해주기 위해 ‘모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선택은 정당하며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까지 내놓았다. 운동적 원칙이 안개처럼 사라진 자리에 사회주의라는 공허한 말만 허물처럼 남겨졌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운동의 원칙 ② 자기결정권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해방된다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민주적 자기결정권’을 노동자계급 운동의 대단히 중요한 사상적 원칙으로 여겨왔다. 이것은 누군가가 그것을 ‘대리’해 줄 수 없다는 사상이다.
한때 ‘김’은 〈노동자의 목소리〉라는 조직에서 우리와 함께 활동했다. 그때 ‘김’은 그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노동자들의 ‘민주적 자기결정권’을 추앙했다. 노동자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회주의 원칙이다. 그런데 우리가 ‘김’을 포함한 〈노동자투쟁〉 그룹과 갈라서게 된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이 노동자들의 ‘민주적 자기결정권’을 바라보는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민주적 자기결정권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분투해야 하지만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가령 기아차지부에서 정규직 조합원들이 비정규직 조합원들을 노동조합에서 쫓아낸 결정을 한 것은 비록 총회 민주주의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반노동자적 결정이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사상, 그리고 하나의 같은 계급이라는 사상에 기초해 단결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적대시하게 하는 자본가계급의 사상, 노동자 대중 위에 군림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관료들의 사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 민주주의-자기결정권’이 무조건적으로 옹호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계급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 특히 자본가계급의 힘이 우위에 있을 때, 노동자들이 자기 계급의 힘을 신뢰하지 못할 때, 노동자들의 선택은 자본가계급의 사상에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사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김’은 기아차지부의 결정에 대해 ‘비정규직 노조의 독자화’와 ‘노동자 민주주의(자기결정권)’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에서 쫓아낸 것을 합리화하려 했다. ‘김’은 ‘노동자 민주주의’라는 껍데기만 보고서 그것을 정당한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자신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이는 명백히 자본가들과 관료들의 분열책동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는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자연스러운 논리적 결과로서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내용이 빠진 ‘껍데기 민주주의’를 추앙했다. ‘김’은 대단히 불합리하게도 그것의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다수 대중의 의식을 추종하는 ‘대중추주의’를 노동자 민주주의 ‘요체’로 보았다. ‘김’을 포함한 〈노동자투쟁〉 그룹은 노동자민주주의에 대한 왜곡되고 허황된 인식에 기반하여 자신의 정치를 펼쳐갔다.
민주적 자기결정권은 어떻게 발휘되는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민주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 이와 나란히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사상이나 정책, 투쟁전술과 요구들로 노동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자들이 옳다고 믿는 바를 스스로도 옳다고 확신하며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분투한다. 하지만 노동자대중이 사회주의자들과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토론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대중이 사회주의자들이 옳다고 믿는 바와 다른 결정을 할 때는 그 결정에 따른다. 기아차 지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도 비정규직 조합원들을 쫓아낸 총회의 결정을 옳다고 믿지 않았지만(지금도 옳다고 믿지 않지만), 그 결정을 따랐다. 활동가가 조합원들의 민주적 결정을 따르는 것과 다수 조합원들의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김’은 이것을 혼동하고 있다.
노동조합 내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들은 다수 조합원들이 지지하는 견해라고 하더라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되었다’고 말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소수라도 이런 문제제기에 동의하는 노동자들이 있다면 나중에 이들과 함께 다시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한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은 밀리더라도 전진을 위한 디딤돌을 놓는 역할을 활동가라면 포기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다. 대중의 옳지 않은 결정을 무조건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위한 발걸음을 준비하는 것, 활동가가 견지해야 하는 자세는 여기에 있다.
대중추수주의
‘김’의 대중추수주의는 창원비지회의 힘이 약화되는 것과 궤를 같이하며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중추수주의란 정책의 현실성이나 가치판단, 옳고 그름 등 본래 목적을 외면하고 대중적 인기에만 영합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정치 행태를 말한다.
2016년 업체폐업을 막아내면서 투쟁의 기세가 올라온 창원비지회를 깨기 위해 2017년 한국지엠 사측은 공격을 본격화했다. 외주화로 단기직 노동자의 일자리를 뺏으려는 사측에 맞서 창원비지회는 전조합원 파업으로 맞섰다. 중재자 역할을 맡은 정규직 노조 관료들은 장기직들의 고용을 보장해주는 안을 제시했다. 이는 계약직 노동자들의 해고를 인정하라는 종용이었다. 계약직 노동자의 해고에 동의하면 장기직의 고용을 보장해주겠다는 '독이 든 사과'였다. 노동자를 분열시키려는 사측의 제시안을 조합원들은 투표를 통해 90% 이상이 압도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사측은 창원비지회 조합원들이 있는 업체 공정에 대해 (정규직 공정으로의) 인소싱을 밀어붙였다. 정규직 노조 관료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해고될 것을 알면서도 인소싱에 합의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독이 든 사과를 걷어차고 노동자의 단결을 추구한 반면 정규직 노조 관료는 독이 든 사과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사측의 노조파괴에 동조했다. 인소싱 이후 대기발령하던 노동자들이 해고까지 되자 조합원들의 기세는 꺾이기 시작했다. 투쟁에 소극적인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총고용 보장’ 요구가 과도하니, 요구안을 낮추자는 의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집행부는 총고용보장의 계급적 의미를 설명하며 노동자들을 설득했다. 아슬아슬한 표차로 요구안을 낮추자는 의견은 기각되었다.
하지만 막상 해고가 현실화되자 노동자들의 불안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총고용 보장’ 요구안을 반대했던 조합원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김’ 역시 태도가 바뀌었다. 단기직 비정규직들을 쫓아내고서라도 장기직 비정규직(조합원)들의 고용을 지켰어야 한다는 다수 조합원들의 의사를 따랐어야 한다는 생각이 ‘김’의 입장으로 분명하게 굳어져 갔다. ‘김’은 지회장으로서 ‘총고용 보장’을 설득했던 것을 ‘강요’한 것으로, 부적절한 행동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조합원들 앞에서 반성한다는 말을 달고 다녔다. 내용의 올바름은 사라지고 어느 입장이 다수였는지만 중요해졌다. 다수의 입장이 어느 새 ‘옳은’ 것이 돼버렸다. 지회장과 집행부를 믿고 지지하며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지키고자 투쟁했던 조합원들은 지도부에 의해 자기 정당성을 잃어버렸다.
왜곡된 ‘노동자 민주주의-자기결정권’은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다수 노동자들의 의견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대중추수주의로 대체되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자기결정권을 옹호해야 한다며 지도부가 대신 결정하고, 지도부가 조합원을 대리해서 투쟁하는 것을 경멸했다. 이러한 경향성은 활동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거나 설득해서는 안 된다는 황당한 주장으로 이어졌다. 단지 노동자들에게 정보만 제공하고 판단을 맡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김’과 <노동자투쟁> 역시 정보만 제공하지 않는다. ‘사측의 (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설득한다. 다만 대중을 앞세워 자신의 정치를 숨기는 방식으로, 정치적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한다.) 그의 이런 태도가 극단화된 결과 대중추주수의로 변질되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불법파견 교섭을 둘러싼 갈등
앞서 간략하게 살펴본 것처럼 2022년 초, 한국지엠 사측은 금속노조에 불법파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섭을 제안했다. 하지만 실상은 현재 일하고 있는 직접생산 공정의 비정규직 260명만을 발탁채용 하겠다는 것이었다. 노측교섭주체인 비정규직3지회, 지엠지부, 지역지부, 금속노조 모두 이 안은 받을 수 없는 안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교섭은 중단되었다. 회사의 발탁채용안이 해고자들을 비롯하여 2차, 3차 하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배제한 분열책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의 과정에서 정규직 노조 관료들이 비정규직 지회 조합원들이 우선적으로 채용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볼 의사가 있다는 식의 말을 흘렸다. 하지만 이마저도 사측이 업체폐업을 강행함으로서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런데 ‘김’은 이 제안에서 한 줄기 희망을 발견했다. 정규직 노조관료의 중재로 정규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거라는 희망 말이다. 그래서 ‘김’은 이미 엎어진 이 제안을 물고 늘어졌다. 생계에 나가있는 조합원들을 조직해서 지회를 압박했다.
‘김’은 한편으로는 대중을 추수하면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의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 ‘김’은 비지회의 요구를 쟁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타협의 길을 찾기에 급급했다. 창원비지회 투쟁에 대한 회의감으로 투쟁팀에서도 빠졌다. 교섭에 희망을 걸었다. 교섭을 할 힘을 가진 정규직 지부에 기대는 것을 당연하게 인식했다. 21년 당시 요구안을 낮춰서라도 김성갑 한국지엠지부 지부장이 교섭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그 연장선상이었다.
게다가 노동자들의 계급적 단결이라는 내용 대신에 사측이 의도한 분열로 가득 차 있는 안일지라도 다수가 지지한다면 그것을 기꺼이 지지할 태세가 되어 있는 대중추수주의자인 ‘김’은 집행부의 입장에 반하는 행동을 조직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쳤다. 생계에 어려움을 느낀 다수 조합원들이 정규직 관료들의 제안을 지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명이라도 정규직이 되어 들어간다면 의미가 있다는 말로 분열이 아닌 것처럼 포장까지 하면서 말이다. 원칙을 배신하는 이들이 자주하는 변명이 이런 류의 ‘실리’주의다.
지엠이 놓은 덫
회사는 자신들의 발탁채용안을 강행하면서 부평과 창원의 비정규직 지회를 압박하려고 5개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하는 방식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319명의 해고를 예고했다. 회사의 발탁채용 대상자 중 조합원 15명이 해고를 감수하면서까지 발탁채용에 지원하지 않았다. 회사는 이를 이용해 다시 비정규직 지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에 빠뜨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의도적으로 창원비지회 지회장과 ‘김’에게 각각 전화를 해서 채용에 지원할 조합원들을 추천해 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창원비지회 지회장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조합원이 거부한 자리에 조합원이 들어가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쟁대위 회의를 통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조합원들에게 전달했다.
이와는 반대로 ‘김’은 사측의 노림수에 정확하게 반응했다. 창원비지회 쟁대위의 결정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발탁채용에 지원할 의사가 있는 조합원들을 모았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반나절만에 급박하게 모임을 진행했고, 회사가 제시한 15명보다 많은 19명이 모였다. 결국 4명을 걸러내야 했는데, 김은 투쟁한 노동자 순이라는 기준을 제시하여 1순위를 꿰찼다. 그리고는 선별의 권한은 사측에게 있다며 교묘하게 자신의 책임은 회피했다.
그런데 비록 15개의 자리였지만, 채용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창원비지회의 다수 조합원들은 발탁채용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런 선택에는 지도부의 지침을 따르겠다는 노동자 의식과, 거부한 조합원들에 대한 미안함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측이 제시한 조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더 나은 기회를 기다리겠다는 계산 또한 깔려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모두가 모여서 논의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그토록 주장해왔던 ‘김’은 이번에는 전체 조합원을 모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 안을 받을 수 있는가 아닌가는 논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조건과 상관없이 정규직으로 가려는 조합원들에게 기회가 생긴 것이 중요했다. 그 결과 들어갈 의사가 있는 조합원만을 소집했고 결정했다. 자신은 지원을 희망한 소수의 의견을 사측에게 전달해주는 전달자 역할인 척 하더니 가장 먼저 정규직으로 지원했다. 자신의 필요가 소수의 요구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지원을 하지 않은(이런 방식의 정규직화에 동의하지 않는) 다수 조합원의 의사는 손쉽게 무시되었다.
이번 행위에 대해 문제제기가 거세지자 ‘김’은 집행부가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고 논의를 제대로 이끌지 않아서 자신이 비난을 듣더라도 감행한 것이라며 모든 책임을 집행부 탓으로 돌렸다.
대리주의로 전락한 대중추수주의
‘김’의 이러한 행동은 대중추수주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김’은 조합원들 다수가 발탁 채용에 응시할 의사가 있지만 비정규직 지회 지도부가 관료적으로 이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신의 배신적 결정이 그런 다수 조합원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런 믿음 없이 어떻게 자신의 배신적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겠는가? 이런 방식으로 ‘김’의 대중추수주의는 그가 경멸하고 혐오해 마지않았던 대리주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것도 다수 조합원들을 배신하는 대단히 관료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김’은 노동자의 민주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원칙에 충실하려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런데 ‘김’은 노동자들이 결정하는 실재 내용을 무시하거나 망각해 버렸다. 형식만을 신주단지처럼 떠 받들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계급적 단결을 고취하고, 스스로 자기 투쟁의 주체로 서며, 스스로 해방되는 전망을 갖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을 ‘김’은 잊어버렸다. 그렇게 되자 ‘김’에게서 노동자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껍데기만 남은 노동자들의 민주주의에 언제든 자본가들과 관료들의 분열 정책이 파고들 수 있다는 것을 ‘김’은 애써 무시해 버렸다. 그는 내용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다수 노동자들이 지지하는 바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했다. 그 결과 마침내 ‘김’이 경멸하고 혐오했던 관료적 대리주의로 전락해버렸다. 극단적 대중추수주의가 그 반대쪽에 있는 극단적인 관료적 대리주의로 전화한 것이다.
‘김’이 주장하고 추구하는 ‘노동자 민주주의, 노동자 자기결정권’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망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김’은 자신이 만든 허구적 현실 속에서 스스로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운동 원칙을 지키는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냥, 단결의 확대를 위해 분투하는 활동가인 냥 으스댄다. 계급이니, 혁명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입에 발린 말로 정치신문과 현장신문을 통해 대중을 호도한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한 바, ‘김’과 〈노동자투쟁〉 조직은 사회주의를 팔아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관료주의의 또 다른 전형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노동해방의 깃발
<노동자투쟁〉 그룹은 ‘김’의 이번 행위에 대한 이견으로 〈노동자투쟁 서울모임〉과 〈노동자투쟁 창원모임〉으로 최근 갈라졌다. ‘김’은 〈노동자투쟁 창원모임〉에 속해있다. 〈노동자투쟁 서울모임〉은 이번 행위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밝혔으나, ‘김’의 배신에 대해 조직의 분리를 정당화할 만큼 근본적이고 날카롭고 정치적으로 분명하게 정리하지는 못했다. 특히 〈노동자의 목소리〉를 분리로 몰아갔던 “노동자 민주주의–노동자 자기결정권”에 대한 자신들의 원칙적 입장을 가지고 ‘김’의 배신을 정치적으로 분명하게 규정짓지 못했다. 〈노동자투쟁 서울모임〉의 이런 정치적 불명료함 때문에 〈노동자투쟁 창원모임〉은 여전히 조직의 분리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자신들과 〈노동자투쟁 서울모임〉이 “노동자 민주주의”에 대한 원칙에서 다를 게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자투쟁 서울모임〉도 ‘김’의 배신에 대한 책임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