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이 7월 22일 51일간의 총파업을 마무리했다.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은 조선소 하청노동자 투쟁의 역사를 매년 새로 써왔다. 이번 총파업도 조선소 하청노동자들로서는 처음으로 결행된 조직적 총파업이었다.
2022년 총파업 투쟁의 서막
올해 총파업은 그동안 거통고조선하청지회가 이끌었던 투쟁 중에서도 가장 처절했다. 물론 이전에도 투쟁이 쉬웠던 적은 없다. 몇 가지 예를들면 2019년 1차 파워노동자 투쟁 시 현장순회, 지원센터 타격, 2020년 명천기업 정리해고 철회투쟁 시 타워크레인 고공농성, 2021년 2차 파워노동자 투쟁 시 2도크 점거, 1도크사이드 점거, 기륭이엔지 임금체불과 고용승계 투쟁 시 1도크 진수저지 등이 있는데 이 모든 투쟁이 예상을 넘어선 투쟁방식으로 진행됐고 원청을 혼배백산하게 만들었다. 하청지회는 형식적인 집회를 넘어서 현장을 뒤흔드는 방식으로 투쟁대오를 이끌었고, 투쟁당사자만이 아니라 현장의 하청노동자 모두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 때문에 대부분의 투쟁은 (모든 목표를 쟁취할 수는 없었지만) 소중한 성과들을 만들어냈고 하청노동자들은 하청지회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하청지회는 올해 총파업을 2021년 파워노동자 투쟁 직후부터 준비하기 시작했다. 도장부 9개 업체부터 교섭을 진행하고 파업권을 확보하기 시작했고, 발판 4개 업체, 탑재 5개 업체, 조립 2개 업체, 의장 1개 업체가 2022년 1월부터 교섭을 진행하면서 2022년 5~6월이면 조직된 대우조선 내 21개 업체 모두가 파업권을 확보해 동시에 합법적 파업이 가능했다.
대우조선 원청이 이를 묵과할 리 없었다. 하청지회는 역사상 첫 합법파업에 대우조선 원청도 모든 것을 동원해 대응할 것이라 예상했다. 이번 투쟁은 사실상 첫 합법파업을 성공시켜 노동조합을 인정받을 수 있느냐 처참하게 깨져 사실상 무력화되느냐의 시험대였다.
하청지회는 2022년은 ‘임금인상 30%’를 명분삼아 1월부터 하청노동자 총궐기를 진행했다. 1월 20일 1차, 2월 22일 2차, 3월 25일 3차 하청노동자 총궐기대회를 개최했다. 4월에는 파업권을 먼저 확보한 도장부 9개 업체의 고용승계 투쟁이 있었다. 2021년 4월 투쟁으로 쟁취한 1년 단위 근로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에 업체들이 재계약을 거부하고 계약해지를 통보했기 때문이다. 현장동력의 핵심이었던 도장부 조합원들의 고용안정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총파업 투쟁 이전 반드시 승리해야만 하는 투쟁이었다. 물론 도장분회가 중심이 되어 전면파업에 돌입했고 8일 만인 5월 2일 고용보장을 약속받았다. 당시 임금 30% 인상을 요구하며 하청지회 전체의 전면총파업으로 확대하자는 의견도 많았으나 아직 도장부를 제외한 다른 업체들의 파업권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곧바로 전면전을 치를 수는 없었다. 이렇게 6월 총파업은 준비되었다.
총파업의 시작, 일사불란한 거점사수투쟁
하청지회는 6월 2일(목) 4시간 부분파업을 하고 PDC#1 민주광장에서 ‘하청노동자 30% 임금인상과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하는 총파업 선포식을 열며 투쟁에 돌입했다. 부분파업은 주말 특근거부로 이어졌고, 월요일(7일)부터는 전조합원 전면총파업이 시작됐다. 1도크 블록을 비롯해 주요 생산거점과 물류거점(발판자재 적치장) 8곳으로 흩어진 조합원들은 이날부터 6월 21일까지 일사분란하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24시간 거점사수투쟁을 이어갔다. 이런 방식의 거점사수투쟁은 원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8곳이나 되는 거점을 사수하는 조합원들은 자신들 업체의 작업만 막았고 아웃소싱으로 들어오는 대체인력만 제지했다. 타업체 하청노동자들과 정규직노동자들의 작업장 출입은 보장했다. 이 때문에 원청에게는 사실상 거점사수투쟁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하청노조의 파업을 지지하는 현장분위기가 높았기 때문에 파업 노동자들을 쉽사리 건드릴 수도 없었다.
6월 11일(토) 총파업 10일 차가 되자 드디어 원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도크 외판도장물량을 인소싱해 정규직에게 넘겼다며 도발을 시작했다. 월요일인 13일부터 대우조선 원청 관리자 수백 명이 각 거점들을 침탈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핵심동력은 대우조선 정규직 관리자 모임인 ‘현책연’과 어용현장조직인 ‘민노협’이었다. 조합원들은 트레일러와 지게차를 온몸으로 막아서고 고소차 바스켓에 들어가 사슬을 묶으며 치열하게 막아섰다. 그러나 침탈해오는 정규직 관리자들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했다. 거점 침탈은 정규직과의 노노갈등을 부추겨서 파업 대오를 고립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정규직 관리자들의 침탈은 더욱 심해졌지만 파업 대오는 침착하게 노노갈등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대우조선 원청은 관리자들을 동원해 파업 대오를 끌어내고 거점농성장을 철거하면서 폭력을 유도하려는 시도가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하자 전선을 더 확대하기 시작했다. 하청업체 대표들은 6월 15일(수)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집단교섭 요구”, “불법 탈법 행위”등의 비방 내용을 담은 ‘호소문’을 내고, 1도크와 발판적치장 거점에 나타나 손해배상으로 협박했다. 6월 18일(토)에는 ‘대우조선해양을 지키는 모임’이라는 오픈채팅방이 개설되었고 하청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원색적으로 매도하는 사측의 여론전이 시작됐다. 이제는 대우조선지회 정규직 관리자들(현책연)에 더해 어용대의원들까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청업체 대표들은 6월 21일 대통령이 개입해 공권력을 투입해달라는 기자회견을 하고, 다음날엔 현장에서 협력사대표 결의대회까지 열고 1도크로 내려와 위력시위를 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옥쇄농성
매일 진행되는 원하청관리자들을 동원한 거점침탈과 불법으로 매도하는 여론전에도 파업대오는 굳건했다. 그러나 파업대오에서는 부상자가 속출하고 피로도가 쌓여갔다. 노노갈등을 피하기 위해 참아야만 했던 조합원들의 정신적 고통은 더욱 컸다. 아마도 대우조선 원청은 이 정도면 하청지회가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실제로 시간이 길어지면서 파업대오도 처음보다는 줄어들었다. 하청지회는 조합원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총파업투쟁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6월 22일 1도크 초대형유조선 선미 화물창 블록의 15미터 높이 스트링거에 6명의 조합원이 올랐고, 유최안 부지회장은 화물창 바닥에 사방 1m의 철제감옥을 스스로 용접해 만들어 옥쇄투쟁을 시작했다. 파업대오는 2개 거점을 제외하고 1도크로 집결해 끝장투쟁에 돌입했다.
이때부터 사측의 도발도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6월 24일 금속노조 결의대회가 열리는 날 정규직 관리들과 하청업체 관리자들을 포함해 수천 명의 구사대가 맞불집회를 열었다. 7월 8일 민주노총 결의대회, 7월 20일 금속노조 총파업대회 때도 대규모 맞불집회가 열렸다. 7월 14일에는 현책연이 주도해 하청노조의 파업 중단을 촉구하는 인간띠 잇기 행사도 열었다. 대규모 구사대를 동원한 맞불집회와 압박은 이전 투쟁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하청지회의 총파업이 시작된 후 한 차례의 협상도 진행되지 않다 7월 1일 21개 업체 중 3개 업체 대표들이 찾아와 협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 3명의 대표들은 나머지 업체들의 위임도 받지 않았고 업체들과의 개별교섭을 고집했다. 3일과 5일까지 이어진 실무협상은 아무런 진전도 없이 중단됐다. 협상이 중단되자마자 바로 다음날(6일) 대우조선해양 박두선 대표이사는 ‘하청노조(의도적으로 ‘하노위’라는 명칭을 사용했다!)의 불법파업으로 공정에 차질이 발생하고 있어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고 모처럼 찾아온 경영정상화의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며 비상경영을 선포한다’는 CEO 담화문을 발표했다. 박두선 대표이사의 담화문은 구사대에게 보내는 공격신호였고 민주노총 결의대회가 열리던 7월 8일(금) 약 5천여 명의 구사대가 1도크를 비롯한 남아있는 거점들을 공격했다. 이날 구사대의 고삐가 풀렸고 구사대는 온갖 욕설과 폭력을 자행했다. 그런데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구사대는 절반 이상이 하청업체들에서 10명씩 차출되어 채워진 인원들이었다. 대부분 억지로 끌려나온 하청업체 관리자들과 심지어 경리까지 포함된 구사대의 맨 앞에서 난동을 부리는 자들은 현책연과 민노협 어용들이었다.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처절한 투쟁에 화답한 여론
6월 22일의 선택은 이후 여론전에서도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냈다.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이 거제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거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규모 집회가 매주 열렸다. 정치권, 종교계, 시민사회단체 등이 지지선언을 하고 행동에 나섰다. 공중파 방송을 비롯한 대부분의 언론도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목숨을 건 파업에 우호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대우조선 사측은 여론에서 완전히 밀려버렸다. 아무리 손실을 부풀리고 수천 명의 구사대를 동원해 하청노동자의 파업을 무책임한 불법으로 몰아가도 여론이 돌아서기는커녕 하청노동자들의 편으로 쏠렸다. 귀족노조프레임은 씨알도 안 먹혔고 ‘오죽하면 저렇게까지 할까’라는 동정여론부터 열악한 조선소의 현실을 확인하고 ‘그럴만하다’는 지지여론이 전국으로 확산됐다. 10000×10000 모금운동의 폭발적인 호응이 이를 증명한다. 파업노동자들에게 7월 15일 월급날 ‘다만 50만원이라도 지급하자’고 시작한 모금운동은 시작 며칠 만에 목표액을 넘어섰고 막판에는 목표액의 두 배를 넘어섰다.
비록, 원해서 시작한 끝장투쟁은 아니었지만 하청지회는 구사대의 폭력과 노노갈등을 피하면서도 쉽게 침탈할 수 없는 철옹성 같은 투쟁거점을 만들어냈다. 감히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의 이 끝장투쟁은 총파업에 참여한 조합원들의 강고한 투쟁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본의 편에 선 정부의 개입
7월 14일(목)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의 총파업 43일, 끝장투쟁 23일이 되는 날 정부에서 처음으로 입장을 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과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도크에서 진수를 기다리는 선박을 점거하는 행위는 명백한 불법행위”이니 “불법행위를 멈추라”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정부의 개입이 시작되자마자 대우조선 원청은 하청업체 교섭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그동안의 입장을 바꿔 7월 15일 원하청노사 4자협의를 제안했다. 하청지회가 9개 요구안 수정제안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한 직후에 벌어진 일이다. 이렇게 시작된 4자협의는 주말을 포함해 매일 열렸다.
교섭이 시작되자 정부는 사측에 더욱 힘을 싣기 시작했다. 월요일인 18일 윤석열은 출근길에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의 총파업에 대해 “산업 현장의 불법상황은 종식돼야”한다고 밝혔다. 이날 윤석열의 지시로 한덕수 국무총리는 오전에 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하고 오후에는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을 ‘불법행위’로 규정하며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대응하겠다’는 관계부처 합동 담화문을 발표했다. 다음날에도 윤석열은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며 사실상 공권력 투입을 의미하는 발언을 했다. 이에 호응하듯 이정식 고용노동부장관과 행정안전부 장관, 경찰청장 후보자까지 헬기를 타고 거제로 내려왔다. 파업현장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기자들에게 ‘공권력 투입도 당연히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공권력 투입’을 거론했던 이상민 행안부장관은 거제 방문 다음 날인 20일 경찰 수뇌부 회의를 주재하며 ‘경찰특공대 투입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윤석열이 대우조선 하청노동자의 끝장투쟁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무게추는 사측으로 옮겨갔다. 대우조선 사측이 그토록 목메어 기다리던 공권력 투입을 대통령을 비롯한 장관들까지 나서 언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1일에는 경찰이 증강 배치되고 1도크 농성장에는 에어매트가 설치됐다. 경찰 헬기는 상공에서 계속 선회하며 위협비행을 하고 있었다. 농성 해산을 위한 공권력투입은 마치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이제는 150여 명밖에 남지 않은 하청노조 조합원들은 수천 명의 구사대와 공권력을 앞세운 정부라는 거대한 적들에 둘러싸였다.
대우조선지회(정규직노조)의 좌충우돌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시작되는 시기에 대우조선 사측은 어용대의원들을 이용해 그동안의 협박을 넘어서 본격적으로 정규직노조를 흔들기 시작했다. 7월 8일 구사대의 광란이 있고 난 후 7월 11일(월) 어용대의원들은 대우조선지회의 조직변경 총회 소집을 요구하는 조합원 서명을 받았다. 하루 만에 4,700여 명의 정규직조합원 중 1,970여 명(약 41%)이 서명에 참여했고, 13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어용대의원들은 공식적으로 총회소집을 요구했다.
어용들은 대우조선지회의 금속노조 탈퇴를 실제로 밀어붙였고 정규직 집행부는 협상이 진행되는 중요한 국면에 조직형태 변경 총회 소집을 받아들였다. 사실상 금속노조 탈퇴를 결정하는 투표가 21일부터 시작됐다. 22일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시작됐지만 1차 개표 후 부정투표가 의심된다며 선거관리위원장이 개표를 중단시켰기 때문에 결과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당일 개표 결과 확인과는 무관하게 대우조선지회의 금속노조 탈퇴 총회는 끝장투쟁 중인 하청지회 조합원들에게 심적 압박이 되었다. 한참 날뛰고 있는 어용들에 의해 정규직노조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하청노동자들의 총파업투쟁은 더 고립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직형태 변경 총회가 진행되기 전부터 대우조선지회는 좌충우돌하며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6월 21일 대우조선지회 정상헌 지회장은 하청업체 대표와 하청지회가 ‘대우조선 전 구성원을 위해 한발 물러서는 결단과 적극적인 교섭태도로 현 사태의 돌파구를 마련 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대우조선지회와 상급단체의 중재노력에도 1도크 진수를 막는 극단적인 투쟁은 전 구성원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공멸을 부를 뿐이고, 하청지회가 극단적 투쟁을 선택한다면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사실상 총파업 중인 하청지회를 협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끝장투쟁에 돌입한 후에는 논조가 더 분명해졌다. 7월 11일 또다시 발행된 대우조선 지회장의 성명서는 ‘대우조선 전 구성원의 공멸을 막기 위한 지회의 결단! 7월 12일까지 하청지회의 결단 요청!’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성명서에서는 7월 10일 대우조선지회 임상집 간부들이 하청지회를 방문해 12일까지 1도크 투쟁에서 철수해줄 것과 대신 함께 산업은행 타격투쟁을 하자고 제안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그러나 하청지회가 끝장투쟁을 포기하지 않자 13일 1도크 농성현장으로 직접 찾아가 같은 내용을 또다시 전달했다. 19일에도 또다시 (정규직)휴가 전에 반드시 파업이 해결될 수 있도록 결단하라고 압박했다. 하청지회는 사측은 물론 정부와 정규직노조 등 사방에서 1도크 옥쇄농성을 풀라는 압박에 시달렸다.
51일간의 총파업이 남긴 성과와 과제
하청지회의 총파업투쟁은 51일 만인 7월 22일 저녁에 잠정합의가 되면서 마무리됐다. 사실상 동결수준의 임금 4.5% 인상에 손배도 막아내지 못했고, 고용보장도 최대한 노력한다는 부족한 합의안이었다. 전국적 투쟁을 끌어내고 사회적으로 우호적인 여론도 형성했지만, 총자본의 공세를 넘어서지 못했다. 단위 사업장의 투쟁이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리전 양상으로 펼쳐졌기에 많은 노동자들이 대우조선 하청투쟁을 지지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합의안의 내용은 대우조선 투쟁을 지지하고 엄호하던 많은 노동자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대우조선 원청이 동원한 수천 명의 구사대, 대우조선지회의 좌충우돌과 압박, 대통령까지 나선 정부의 공권력 투입 협박을 150명의 하청조합원들이 돌파한다는 것은 사실상 쉽지 않았다.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지만 대우조선지회의 혼란으로 집회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물론, 비정규직 노조 투쟁에 금속노조가 매주 집중집회를 열고 가능한 동력을 대우조선에 집중시킨 것은 큰 힘이 되었지만 여전히 1도크 옥쇄농성 현장을 지키는 것은 고립된 150명의 몫이었다. 그리고 조합원들에게는 1도크에서 31일을 사방 1m의 감옥에 갇혀있던 유최안 부지회장과 15m 스트링거에서 고공농성 중인 6인이 동지들, 서울 산업은행 앞에서 9일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3인의 동지들이 합의안보다 더 중요했다.
그래서인지 합의안을 가결시킨 조합원들치고는 의아할 정도로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끝까지 투쟁에 함께했던 조합원들은 여전히 눈빛은 살아있고 절망감이나 패배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51일간의 끝장투쟁을 해낸 조합원들은 이번 투쟁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런 현상은 하청지회 총파업투쟁이 남긴 가장 큰 자산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총파업투쟁을 함께한 150여명의 조합원. 이들이 이 투쟁이 남긴 가장 큰 성과이자 자산이다. 게다가 조선소 하청노조 역사상 최초로 단체협약까지 체결했다. 즉, 하청노조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금속노조가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만천하에 알려내고 전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냈다며 ‘사회적 승리’라고 포장하지만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필요는 전혀 없다. 어떻게 이번 합의안을 놓고 ‘승리’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패배했다고도 할 수 없다. 51일간 끝까지 총파업 투쟁을 함께한 하청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될 훨씬 대중적인 진정한 총파업투쟁은 이제 시작이기 때문이다.
윤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