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삼호중공업 블라스팅 노동자들이 12월 12일부터 작업거부 투쟁에 돌입했다. 이들은 선행도장 사내협력사 4개사 중 3개사 40여명의 노동자들이다. 그동안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노동자임에도 노동자가 아닌 3.3%의 사업소득세를 내는 개인사업자 신분으로 일해야만 했다. 엄연히 불법이지만 조선소에는 이런 눈속임으로 노동자가 아닌 가짜사장님들이 비일비재하다.
노동자이지만 노동자가 아닌 유령
조선소에는 가짜사장님들이 많다. 대부분 물량팀 소속으로 일하거나 외부 파견업체 소속으로 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현장에 투입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업체의 작업지시를 받고 출퇴근시간을 통제받지만 개인도급형태의 개인사업자 신분이다.
4대보험을 가입하지 못하는 가짜사장님들은 노동자로서 보장되는 모든 혜택에서 제외된다. 심지어 정부와 원청으로부터 지원되는 모든 후생복지에서도 제외된다. 아무리 오래 근무했어도 근로기준법은 적용되지 않아 휴일/연장근로수당은 물론 퇴직금도 없고 52시간제도 무용지물이다. 오로지 자신의 몸을 갈아넣어 업체와 원청이 요구하는 시간내에 물량을 쳐내야만 약속한 일당이나 공사대금을 받게 된다.
높은 임금, 그러나 대가치고는 가혹한 노동환경
이들의 임금은 조선소의 평균 임금보다 상당히 높다. 그런데 이 높은 임금은 자신의 몸이 망가져도 산재신청을 할 수 없고, 회사가 불러내면 새벽이든 한 밤중이든 나와서 일을 해서 받는 노예처럼 일한 대가에 불과하다.
이뿐인가! 이들의 노동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조선소에서도 극상의 노동강도로 유명하고 이제는 블라스팅 일을 배우려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전국적으로도 소수만 남아있다. 특히, 현대삼호중공업 선행도장 블라스팅은 악명이 높다. 보통 필요인원보다 서너 명은 적은 인원으로 물량을 쳐내야하기 때문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또한, 물량제이다보니 안전조치도 제대로 하지 않고 일을 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번 작업거부 투쟁에 돌입한 블라스팅 노동자들의 2대 요구 중 하나가 ‘키높이 이상 족장 설치’다. 8KG 이상의 압력으로 쇳가루를 분사하는 에어호스를 잡고 족장도 없이 고소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언제든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두 달을 기다렸지만 협의조차 거부한 사측
현대삼호중공업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10월 중순경 4개 업체에 ‘물량제 폐지, 4대보험 보장’을 요구하며 12월 12일까지 답을 달라고 충분한 시간까지 줬다. 그러나 하청업체들은 일절 대화에 응하지 않았고 최종시한이 다가오자 ‘계약해지하겠다’,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협박문자로 대응했다. 결국, 12월 15일(목) 작업거부투쟁에 참여중인 40여명 전원에게 계약해지통보서를 보냈다. 우스운 것은 ‘계약해지’를 할 도급계약서를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부려먹을 때는 노동자로 부려먹고 4대보험 가입해달라니 쓴 적도 없는 도급계약 관계라며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하는 자들이다.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면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지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싸우냐고 타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제 막 조직되어 싸울 때는 사측에 대화를 요청해도 받아들이는 자본가들은 거의 없다. 오히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탄압한다. 이미 조직된 대기업 노동자들에 비해 조직력이 약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허용된 것은 노예처럼 일할 자유밖에 없다.
물량제로 이득을 보는 자들
노동자가 4대보험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는 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업체들은 물론 원청도 지극히 정당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원하청 자본가들은 블라스팅 노동자들의 높은 임금을 조선일보 등에 흘리며 이들의 요구가 과도하다는 여론을 만들려 한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미쳤다고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주겠는가? 4대보험을 가입시키지 않고 개인사업자로 부려먹는 편이 자본가들에게는 더 이익이다. 일단 4대보험 가입에 따른 사측 부담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개인사업자이기 때문에 언제든 고용과 해고가 가능하다. 노동시간/노동강도 등도 마음대로 높일 수 있다. 혹시라도 근골격계 질환이 발병하거나 사고로 다쳐도 산재로 처리해줄 필요도 없게 된다. 즉, ‘노동자’로 고용하는 것보다 ‘개인사업자’로 둔갑시키는 편이 원하청 자본가들에게는 훨씬 이득이다.
블라스팅 노동자들의 작업거부투쟁은 조선소 내 가짜3.3%(개인사업자) 물량제를 폐지하자는 투쟁이다. 고용불안, 저임금, 임금체불 등으로 어쩔 수 없이 높은 일당을 쫓아 다녀야 하거나 정해진 물량에 따른 공사대금을 받으며 일하는 조선하청노동자들은 원해서 가짜사장님이 된 것은 아니다. 원하청 사업주가 그렇게 일하지 않으면 고용하지 않기 때문에, 돈을 더 받을 수 있다고 감언이설로 속이기 때문이다. 물량제로 이득을 보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이 원해서 4대보험을 가입하지 않고 일당과 물량제로 일하는 것이라는 말들을 퍼트리는데 정작 자신들이 취하게 되는 이득과 불법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한다.
똘똘 뭉친 블라스팅 노동자들이 반드시 승리하기를
현대삼호중공업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4개 업체 중 3개 업체 노동자들이 뭉쳐 작업거부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근처에 있는 대불산단의 블라스팅 노동자들도 이들의 투쟁을 응원하고 있고 대체인력으로 일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물론 사측은 어떻게 해서든 대체인력을 투입해 공정지연을 막아보려고 노력중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투입하기도 했고, 울산에서 모아온 한 팀을 거액의 일당을 주며 투입시키기도 했다. 과거 블라스팅 일을 했었던 정규직 노동자 몇 명이 이들이 하던 일에 투입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물량적체는 늘어나고 있다. 기존에 일하던 블라스팅 노동자들의 노동강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고, 대체인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제와 울산의 블라스팅 노동자들도 현대삼호중공업의 소식을 알고 있다. 같은 블라스팅 노동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가 얼마나 절박한지도 잘 안다. 따라서 높은 일당을 불러도 쉽게 대체인력으로 투입되어 그들의 투쟁을 무너뜨리는 짓은 하지 않으려 한다.
집단계약해지로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된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아직 항복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원하청 자본가들의 만행에 분노하고 투쟁의 결의를 높이고 있다. ‘대체인력 투입으로 공정에는 차질이 없다’는 원청 현대삼호중공업이 거짓말을 하고 있으나 시간이 갈수록 문제는 심각해질 것이다. 비록 힘겨운 투쟁이지만 조선소 물량제 폐지를 전면에 내세운 블라스팅 노동자들의 투쟁이 승리로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이 쏘아올린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에 또 다른 물꼬가 터질 수 있을 것이다.
윤용진
“더 이상 가짜 사업자로 살 순 없다”
노동자로 인정하라
안녕하십니까? 현대삼호중공업 사내하청 블라스팅 노동자입니다.
이번 블라스팅 노동자 투쟁은 가짜 개인사업자 물량팀이 아닌 현장에서 같이 땀 흘리며 노동하는 노동자로 살기 위해 투쟁을 시작합니다. 더 이상 가짜 사업자로 살 순 없습니다.
모든 조선소 노동자들이 그럴 듯 한여름 40~50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열기와, 손발에 동상이 걸릴 정도로 냉혹한 겨울을 보내며 온몸이 망가져도 세계1위 조선산업이라는 자부심과 블라스팅이라는 특수성으로 밤,낮,휴일을 가리지 않고 노동했습니다.
하진만 돌아온 것은 4대보험 가입 요구에도 사측은 거부했고, 상시적 폐업으로 임금, 퇴직금은 체불되었습니다. 노동자로서 보호 받지 못하니 당연히 법정공휴일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일하다 다치거나 골병이 들어도 산재요구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물량팀이란 고용구조 때문에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 가짜 개인사업자 경험은 혹독했습니다. 더 이상 가짜 개인사업자로 살 순 없습니다. 조선산업이 활력을 되찾는 지금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사측과 원만한 대화로 이를 해결하기를 바랍니다.
사측은 즉각 대화에 나서길 다시한번 강력히 요청합니다. 하지만 사측이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더 이상 이를 방관할 순 없습니다.
노동자로 인정받고,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찾는 날 까지 블라스팅 노동자는 투쟁 할 것입니다. 많은 지지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 현대삼호중공업 사내하청 블라스팅 노동자 -
※ 위 글은 작업거부투쟁에 돌입하기 전인 12월 초 한 블라스팅 노동자가 절박한 심정으로 쓴 호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