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0일,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감독 봉준호)이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 장편 영화상 4개 부문을 휩쓸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어떤 점이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일까?
뉴욕타임즈는 ‘기생충’을 올해의 영화로 꼽으면서 “반지하와 대저택은 현대사회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장소로 어디서든 벌어지고 있는 계급투쟁에 대한 교훈을 전하고 있다.”고 평했다. 평론가들은 ‘기생충’이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각본상 등을 수상한 데는 영화가 던지는 사회적 메시지, 곧 ‘부의 불평등’ 문제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런데 이들의 말은 진실일까?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에 대해 그동안 그렇게 대단한 혐오를 드러냈던 이들이 어떻게 봉준호가 ‘기생충’에서 전하는 계급투쟁의 교훈을 극찬하면서 최고의 상들을 안겨주고 있는 것일까?
가난한 두 기생충 가족과 부자 숙주
영화 기생충에는 세 가족이 등장한다. 첫 번째 가족은 큼큼한 곰팡내가 나는, 물난리가 나서 방이 반쯤 물에 잠기고 변기통의 똥물이 역류하는 반지하방에서 살아간다. 이 반지하방은 가난의 상징이다. 이들 네 가족은 사기를 쳐서 대저택의 과외선생님과 가사도우미와 운전기사로 들어가게 된다.
두 번째 가족은 사업실패로 빚더미에 올라앉아 채권자들을 피해 대저택의 지하실에서 집주인 ‘몰래’ 더부살이를 하고 있던 가사도우미 부부다. 이들은 첫 번째 가족의 사기에 당해서 행복한? ‘더부살이-기생살이’에 파산을 맞는다. 이 부부는 이 더부살이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경쟁 상대인 첫 번째 가족과 목숨을 건 생존투쟁을 벌이다 죽게 된다.
이 영화의 제목이 ‘기생충’인 이유는 감독 봉준호가 이 가난한 두 가족이 대저택의 부자 가족에 ‘기생’해 살아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의 부자들이 영화 ‘기생충’에 열광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 번째는 성공한 IT사업가 가족이다. 이들은 대단한 건축학 박사가 지었다는 으리으리한 대저택에서 산다. 이 대저택은 부의 상징이다. 이 대저택에서 성공한 IT사업가 가족은 과외선생님과 가사도우미와 밴츠 자동차를 모는 운전기사를 거느리고 산다.
가난한 기생충의 행복과 부자 숙주의 고통
첫 번째 가족은 취객이 창문에 오줌을 내갈기는 ‘곰팡내 나는’ 반지하방에 살아가지만 대저택에서의 삶만은 행복하고 풍요롭다. 봉준호는 가난한 이들의 기생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봉준호의 시각에서 가난한 이들은 부자들의 혜택 속에서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 ‘기생살이’라도 잘 해나가려면 가난한 이들은 부자들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면 안 된다. 주제넘게 선을 넘어서 부자들을 가르치려 하거나 충고하려고 함으로써 부자들의 영역을 함부러 침범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봉준호의 눈에 비친 가난한 이들은 선을 지키면서 부자들에 봉사하면서 그 대가로 삶을 구걸하는 기생충인 것이다.
그러나 부자들이라고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자들도 과외선생님과 가사도우미와 운전기사를 부려먹으려면 이들의 몸에 베인 반지하방의 큼큼한 곰팡내 정도는 참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부의 불평등을 옹호하는 방식
영화 기생충은 부의 불평등을 신랄하게 폭로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희망도 없다. 그래서 처연하다. 가난한 이들은 내내 그렇게 ‘기생충’처럼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봉준호가 가난한 이들에게 전하는 절망의 메시지다. 이것이 아카데미의 부자들이 그렇게도 환호하면서 ‘기생충’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다. 그리고 이것이 봉준호와 아카데미의 부자들이 부의 불평등을 그렇게도 신랄하게 폭로하면서 그것을 옹호하는 방식이다.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가짜 계급투쟁이 아니라 생산현장에서 벌어지는 노동계급의 진짜 계급투쟁만이 자본주의 세상의 부의 불평등을 깨칠 진정한 출구가 될 것이다.
김정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