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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반대한다!

#1. 임관 후 전차 조종수로 복무한 변희수 하사는 휴가 기간에 해외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고 복귀했다. 이후 법원에 성별 정정 허가 신청을 했고 복귀 후 군 병원에서 심신 장애 3 판정을 받았다. 변 하사에게 강제 전역 조치가 이뤄졌다.

 

#2. 성전환 수술로 여성이 된 A씨는 숙명여대 법학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를 중심으로 일부 학생들이 반발했다. ‘입학하면 괴롭혀서라도 쫓아내겠다는 말이 학내 게시판에 올라오는 상황이 되자, A씨는 결국 스스로 입학을 포기했.

 

설 자리가 좁은 성소수자들

2018년, 세계보건기구(WHO)는 트랜스 젠더를 ‘정신질환 및 행동장애’ 범주에서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많은 트랜스 젠더들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늦긴 했지만 그래도 발전적 변화이다. 
한국에서도 최근 성소수자와 관련된 뜨거운 이슈가 있었다. 올해 1월, 성전환 수술을 한 군인이 여군으로 군복무를 지속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으나 강제 전역 조치가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이 일이 이슈화되면서 변하사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중에게 공개되고 혐오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2006년 대법원은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 신청을 허용했기 때문에 변하사의 성별 전환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현실은 성소수자들에게 여전히 가혹하다. 변하사 사건은 성소수자들에게 허용된 사회의 문이 여전히 좁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얼마나 배타적인지 보여주고 있다.


억압받던 대상이 또 다른 억압을 야기할 수 있다

한편, 숙명여대 합격자 A씨에게 가해진 위협들은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남녀 사이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한 활동을 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왜 A씨의 여대 입학에 대해서 극렬하게 반대했을까? 
급진적 페미니스트(래디컬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과 남성을 ‘계급’으로 인식한다. 이들은 지배계급인 ‘남성’의 권력에 맞서 억압받는 ‘여성’의 권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남성은 적대적인 세력이며, 타고난 성은 바꿀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트랜스여성(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스스로 여성으로 정체화한 경우를 일컬음) 역시 남성과 동일시하여 적대시한다. 
이들은 트랜스여성을 ‘토끼 탈을 쓴 늑대’라 칭하면서 이들이 여성의 공간에 들어오면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고 불공정한 상황을 만든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A씨의 여대 입학이 여성 공간에 대한 ‘남성의 침입’인 냥 호들갑을 떨며 공격을 해 댄 것이다. 이들은 A씨의 입학을 막기 위해 마녀사냥 식 여론몰이를 서슴지 않았으며, 이는 혐오 선동으로 이어졌다. 억압을 없애기 위한 활동이 또 다른 억압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혜화역 시위에서도 비슷하게 등장했다. 생물학적 여성만이 시위에 참석할 수 있도록 제한하면서 이러한 차별은 더 큰 갈등과 대립을 낳았다.
A씨 사건은 성으로 인한 차별을 없애자는 페미니즘 운동이 의도와는 다르게 혐오를 확대하고 또 다른 차별을 만들 수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의 문제는 계급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항상 낮았던 것은 아니다. 원시 공산제 사회인 경우 성별 노동 분업은 존재했으나 억압적인 성격을 갖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산력이 확대되고 잉여생산물이 늘어나면서 사적소유가 발생했고, 사적소유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즉 계급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성에 따른 분업이 억압적인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즉 생산의 발전은 계급억압뿐만 아니라 여성억압도 탄생시켰다. 계급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역시 더욱 공고화되었다. 가부장제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피지배계급을 더욱 효율적으로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해 왔다. 
또한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가 억압받는 것은 아니다.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이나 이명희 신세계 회장 등 이미 많은 여성들이 자본가의 위치에서 억압자로 존재하고 있다. 박근혜, 나경원 등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철저하게 대변하는 여성 정치인들도 많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남성노동자가 여성노동자보다 더 많은 취업의 기회를 갖고, 높은 임금을 받는 것에 격분하지만 정작 자본가계급 여성들이 남성노동자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더 많은 돈과 권력을 가져가는 것에는 침묵한다. 이들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여성’이라는 성별이 아니라 ‘자본가’라는 계급적 위치에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삼성가에 즐비한 여성자본가들


성소수자들을 차별하고 혐오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역사만큼 성적 관습, 관계, 태도 역시 다양하게 존재해왔다. 성소수자들 역시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해왔고, 자유롭지는 않지만 공동체의 일부로 살아왔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이 사랑을 해서 자녀를 낳아야 한다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확대되면서 성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 역시 강화되었다. 그렇기에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이미 존재하는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 
자유로운 성은 불가능한 게 아니다. 실제로 러시아혁명 이후 동성애는 합법화되었다. 독일에서도 혁명적 분위기가 불타올랐던 시기 동성애 문화가 자유롭게 열렸다. 
착취에 맞서 세상을 변혁하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경제적 조건만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지금까지 자신들을 억압해왔던 모든 종류의 차별과 억압을 부수기 위한 운동으로 확대된다. 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을 새로운 사회는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차별을 철폐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대중들의 가슴 속에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 대한 갈망의 불씨가 남아있는 한,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든 차별과 억압을 철폐시키는 길로 전진해 나갈 것이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세상을 향하여

차이가 차별을 낳지 않는 세상,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런 세상에서는 누구도 소외받지 않고 모든 구성원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맺는 그런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수많은 과제들이 있다. 지금 벌어지는 억압과 차별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세상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누가 적이고 누가 연대의 대상인지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억압을 없앨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경험과 편견이 만든 허상을 벗어던지고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보여준 과학적 세계관이 우리에게 나침반이 되어 줄 것이다.


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