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8일, 경북에 한 실업계 고등학교의 기숙사에서 한 학생이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자살로 판명났지만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살 직전에 주변인들에게 기능대회를 준비하는 기능반 활동으로 인해 학교생활이 힘들다는 것을 토로했다고 한다. 기능대회의 메달경쟁에 대한 압박감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
변질된 기능대회
기능대회는 스펙쌓기의 한 종류가 아니었다. 원래 기능대회는 고용노동부가 주최하는 숙련 노동자의 ‘기술적 기능 능력’을 평가하고 선보이는 대회였다. 1964년 이후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정책을 추진했던 박정희 정부가 국제기능올림픽 출전을 결정하고 1966년 국제대회에 참관인단을 파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회이다. 이 대회를 통해 국위선양과 한국 상품의 이미지를 높여서 수출을 증대하겠다는 경제적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다 공업고등학교의 대폭적 지원과 맞물리게 되면서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이 기능대회에 대거 참여하게 된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기술력을 평가 받고 선보인다는 원래 취지와 다르게 경쟁에서 승리한 기능공을 선발하는 자리로 바뀌게 되었다. 게다가 대회에서 수상할 경우 대학 진학과 대기업 취업의 기회를 우선적으로 부여하게 되면서 실업계 고등학생들의 메달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게 되었다. 원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취업을 위한 통로로서 변질되어 간 것이다.
폭주하는 기관차에 탑승한 청소년들
기능반에 들어가게 되면 일반 정규수업은 제대로 듣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계속되는 반복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 합숙훈련을 강요받기도 한다. 학생들의 성과가 선생의 성과로도 이어지기 때문에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숨진 이 군의 경우에도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고 학교에 토로했으나 학교에서 놓아주지 않았고 코로나로 인한 비상 상황에서도 합숙훈련을 진행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또한 기능반의 운영은 소수의 입상을 위해 다수가 희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증언들이 나온다. 3학년들이 대회준비에 올인할 수 있도록 준비과정과 뒷정리는 1-2학년 후배들이 도맡아서 하게 되는데 아침 일찍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모든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거기에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로 인한 학교폭력도 심심찮게 발생해왔던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교가 입시라는 목적을 위해 달려가고 있다면 실업계 고등학교는 취업을 위해, 그리고 취업에 유리한 기능대회 입상이라는 목표를 위해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무한 경쟁과 거기서 살아남을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되는 것이 당연한 교육이 인문계 실업계 할 것 없이 모든 고등학생에게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취업난의 고통이 청년들에게서 청소년까지
IMF사태가 터지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까지 장기 불황으로 접어든 경제상황은 노동자들을 더욱 어려운 처지로 내몰았다. 구조조정과 해고가 일상화되고 남아있는 노동자들의 임금은 점점 하향평준화 되었다. 그나마 새로 생기는 일자리들은 단기직, 비정규직, 저임금의 불안정한 것들 뿐이고, 그마저도 일자리가 잘 나지 않아 노동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사라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청년들 역시 이런 경제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점점 더 가중되는 취업난, 특히 청년들의 높은 실업상태는 청소년들의 경쟁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면 내 처지가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삶이 파탄날 거라는 위기의식으로 번지면서 경쟁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해졌다. 인문계열 학생들은 명문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경쟁으로, 실업계 학생들은 취업을 위한 경쟁으로 끝없이 내몰리고 있다. 이 답답한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청소년들의 삶은 얼마나 고달플 것인가.
이미 만연한 ‘경쟁’ 사회
학교를 벗어나면 상황은 나아지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글 같은 이 자본주의 사회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철저하게 적용된다. 기업은 인사고과를 통해 승진의 기회를 부여하거나 권고사직을 하기도 한다. 임금 역시 성과급, 직무급 등의 방식으로 차등 지급한다. 수많은 인턴들을 뽑아놓고 경쟁을 붙여 성과를 매겨 적은 수의 인원만을 정규직으로 선발한다. 학교에서 줄세우기를 하듯 주변 동료들과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뚜렷한 기준 없이 경쟁을 하고 승패가 나눠지고 결과에 대해서 반발조차 하지 못한 채 받아들이는 삶에 익숙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은 서로를 짓밟고 올라가야 하는 존재로 여기게 된다. 성별, 나이, 작업능력, 고용형태 등 모든 것이 경쟁꺼리가 되고 노동자들의 단결은 더욱 힘들게 된다.
게다가 회사는 이를 악용해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인사고과를 낮게 매기거나 차별을 두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노동자들이 뭉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살기 위해 매달린 경쟁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이 단결하지 못하도록 부추기는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경쟁이라는 그림자
경쟁은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의 장점과 능력을 겨루며, 그러한 과정에서 살아남는 자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긍정적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참가자 모두가 노력하게 되므로 사회가 계속 움직이는 동력원이 될 수도 있고, 상대방과 경쟁을 하게 된다면 상대보다 더 나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경쟁은 모든 이들의 성장을 돕는다는 것이다.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경쟁은 매우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임이 분명하다. 심지어 비용까지 줄일 수 있는 훌륭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도 경쟁은 긍정적일 것인가?
한 프랑스의 뇌과학자는 “경쟁은 최상위권 학생들에게는 실력 향상의 모티브가 될 수 있다. 가장 높은 고지에 올랐다는 성취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수에게만 그런 성취감이 허락된다. 중간이나 하위권 사람들에게는 정반대의 효과를 나타낸다. 오히려 좌절감을 안겨주고 여러 도전적 과제에서 멀어지는 요인이 된다. 특히 경쟁력 향상을 위해 학생들에게 시험과 성적으로 압박하면 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뉴런의 작동에 지장을 받는다”고 하였다. 결국 경쟁은 이기는 소수만을 위한 것이다. 이기는 자가 많은 것을 독식하는 구조에서 패배한 다수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소수가 모든 것을 독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도 권력도 없는 노동자계급이 이런 경쟁을 좋아할 이유도, 찬성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경쟁이 아닌 협력
인간의 노동이 창조해온 모든 것들은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서로 힘을 합치지 않고서는 생존조차도 불가능했다. 힘을 모으고 협동을 기반한 노동을 통해 더 많은 생산물과 도시를 만들었다.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하나만 보더라도 전 세계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노동이 결합되지 않고서는 단 한대도 만들 수 없다. 경쟁이 세상을 발전시켜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 근본에는 ‘협력’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고 단결하는 것이 누군가를 짓밟고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가치인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가진 게 없는 노동자 개인이 경쟁에서 이기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결국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 혹은 밀려날 것이 두려운 이들은 삶에서 희망을 찾지 못해 자신의 생을 저버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 실업계고등학생처럼 말이다.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과 처지를 나아지게 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경쟁이 아닌 협력이 답이다. 내 옆의 노동자의 손을 잡는 것, 그리고 함께 단결해서 우리의 권리를 지켜내는 것. 그것만이 지옥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