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거나 살아남아 일하거나
2016년 구의역에서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던 노동자가 사망했다. 2018년 충남 태안 화력 발전소에서 일하던 김용균 노동자가 사망했다. 2019년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김태규 노동자가 사망했고, 2020년 4월 29일에는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 사고로 한꺼번에 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사고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난다. 하루 평균 6~7명, 매년 2,400여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고, 11만 명의 노동자가 재해를 당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서 다음 날 일을 하러 갈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일 뿐이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죽어야 이 죽음의 행렬이 멈출 수 있을 것인가?
그 어디에도 ‘안전’은 없었다

지난 5월 22일, 광주에서 김재순이라는 청년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했다. 폐기물 처리장에서 일하던 이 노동자는 파쇄기에 걸린 폐기물을 빼내려다 파쇄기 톱날에 끼어 25년의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런데 사장은 이 사건에 대해 발뺌하기에 급급했다. 이 노동자가 지적장애 3급을 진단받았는데도 처음 조사 때는 ‘몰랐다’는 말로 일관했다. 사장은 ‘작업장에서 사수가 없는 상태에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다가 자기 과실로 숨졌다.’며 모든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 넘겼다.
그러나 진상조사위원회가 확보한 CCTV에 따르면 그렇지 않았다. 고인은 2인 1조로 작업해야 하는데 홀로 작업했다. 파쇄기 덮개도 없었으며 작업용 집게도 없이 손으로 작업해야 했다. 낙상을 막아줄 난간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위급한 상황에 대비한 비상정지장치도 없었고, 기본적인 작업발판조차 없었다. 안전교육 같은 건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사고를 당하기 전에도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장면들이 CCTV에서 발견되었는데 고인은 늘 죽음을 등에 업고 작업을 해왔던 것이다. 경찰조사에 들어가자 고용주는 뒤늦게 안전시설 미비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개인이 잘못했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고, 그리고 예견된 사고
2014년에도 목재 파쇄기에서 한 노동자가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사망사고에도 불구하고 고용노동부의 안전관리감독은 이뤄지지 않았고, 따라서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고용노동부의 부실관리로 유해위험 요인은 그대로 방치되었고 이는 또다른 사망사고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광주 지역에서 파쇄기를 사용하는 재활용 업체는 대부분이 50인 미만을 고용하는 영세업체들이다. 이 때문에 노동부의 관리감독에서 계속 뒤로 밀리게 되거나 관리감독을 하더라도 선별적으로 한다. 그러나 관리감독은 선별적으로 할 수 있지만 안전사고는 선별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이 죽는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뒤늦게 점검에 나서기도 하지만 사람이 죽은 뒤에 하는 뒷북행정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노동자의 죽음을 막기 위한 법조차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고, 변변찮은 법에서 규정해 놓은 기본적인 안전장치들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업주가 허다하다. 광주 뿐만이 아닐 것이다. 전국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놓여있는 모든 사회가 이러할 것이다. 자본가는 그저 이윤을 쫓을 뿐, 노동자들의 안전은 뒷전인 것이다. 지금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생(生)과 사(死)의 경계, 그 어디쯤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장애보다는 한 사람의 노동의 몫
고인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취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건설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사고를 당했던 조선우드 폐기물 업체에 취업했다. 일이 너무 힘들어 다른 곳으로 이전하려 했지만 장애로 인해 취업이 되지 않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했다. 고인은 장애인이기 이전에 성실하고 착실하게 일해 온 한 명의 노동자였다. 고된 일을 마치고 동료들과 고기 한 점에 소주 한 잔이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용주는 고인이 가진 장애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위험한 업무를 맡겼다. 안전설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아 비장애인에게도 위험한 일을 장애를 가진 노동자에게 담당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고인을 죽음으로 내몬 것과 다를 바 없다. 일을 하다가 미흡하거나 실수를 할때마다 사측이 고인에게 심하게 지적을 하면 고인이 듣다듣다 ‘나는 장애가 있는 사람인데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다 하라는 거냐’ 라고 대들기도 했다는 주변 지인들의 증언도 있었다고 한다. 스스로 노동 능력의 범위를 알고 있었지만 적절한 노동 배치에 대한 요구들은 묵살당했다.
사장에게 노동자란 그저 쓰다 버리는 소모품일 뿐이다. 특정 노동자에게 어떤 작업을 맡는 것이 나을지에 대한 고민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작업의 효율성만을 따졌다. 노동자들이 다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이윤을 챙기는 데만 급급한 자본가들, 노동자가 죽어도 나몰라라 하는 자본가들, 그리고 이에 대해 제대로 된 처벌도 하지 않는 정부로 인해 오늘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다.
더 이상 죽지 않게! 누구나 안전하게 일할 권리 쟁취를 위해!
“도대체 앞으로 더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야만 산재 사고가 멈출까요?” 고인의 아버지가 기자회견 때 했던 말이다. 노동자가 숨져도 기계는 돌아가고, 먹고 살기 위해 하는 노동이 목숨을 위협하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하지만 아픔을 넘어 이제는 바꿔야 한다. 장애인이든, 이주노동자든, 비정규직이든, 여성이든, 청소년이든 할 것 없이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이 차별 없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어야 한다.
2018년 김용균 산재 사망을 계기로 만들어진 ‘김용균법’의 한계가 속속히 드러나고 있다. 또, 계속되는 산재사고로 조금씩 주목받고 있는 ‘중대재해 처벌법’은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법은 최소한의 조치이다. 더 나은 노동 환경을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부터 치열하게 투쟁해야 한다. 노동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작업에 대한 거부권을 노동자들이 가질 수 있어야 하며, 안전을 위한 장치와 제도를 즉각 마련하도록 계속 요구하고 투쟁해야 한다.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위해 단결해서 더 큰 힘으로 싸우자.
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