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환 민주노총 前위원장이 대의원대회에 붙인 ‘노사정 합의안’이 반대 805표(61.7%), 찬성 499표(38.3%)로 부결됐다. 김명환 위원장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번 노사정합의안은 노동자들의 ‘양보와 희생’을 전제로 해서 ‘기업을 살리겠다’는 자본가 지원계획으로 채워졌다. 그런데도 합의문은 ‘저소득층ㆍ취약계층’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런 기만적이고 반(反)노동자적인 합의문이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승인이 거부된 것은 당연하다.
부결의 이유
그동안 김명환 위원장은 사회적 대화를 주장해 왔다. 위원장으로 출마할 때부터 사회적 대화를 강조했던 김명환 위원장은 경사노위 참여부터 이번 노사정 합의까지 문재인 정부와의 협의를 계속 관철시키고자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2019년 1월 28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도 경사노위 참여를 두고 찬반토론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투표 결과 참여는 부결되었지만 이때 경사노위 참여에 반대(조건부 반대 포함)하는 대의원은 39%에 불과했다. 물론 찬성도 44%로 과반수에 미달하여 가결되지 않고 안건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안건 승인 여부를 떠나 표로 나타난 대의원들의 의사를 확인해보면 확고한 반대는 적고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던 인원을 포함해 60% 가량은 문재인과의 대화를 찬성하거나 판단을 유보하는 입장이었다. 상황에 따라 충분히 가결도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대의원대회에선 39%의 반대가 61% 반대로 증가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는가?처음 문재인정부가 들어섰을 때 노동존중을 내세운 민주당 정권에 대한 노동자들의 기대가 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작년 대의원대회 이후 1년 6개월의 시간동안 문재인 정부가 보여준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스스로 폐기한 것도 모자라 오히려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로 실질임금은 삭감되었고, 자본가들의 입맛에 맞게 노동개악을 밀어붙이는가 하면, 비정규직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이전의 정권과 다를 바 없이 탄압하는 모습을 보면서 친노동정부가 아닌 친자본정부라는 것을 직접 확인한 노동자들에게 실망은 점점 커졌다. 이번 민주노총 대의원 다수의 반대는 문재인정부에 대한 현장 노동자들의 문제의식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강성 몇몇이 떠들어댄다고 다수의 대의원들이 입장을 바꿨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번 대의원대회 표결은 조직의 표싸움도, 강성 대 온건파의 싸움도 아닌 반(反) 문재인 대 친(親) 문재인의 성격이 강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무한신뢰로 민주적 절차마저 무시한 채 대의원대회 표결을 밀어붙인 김명환위원장의 패배는 잘못된 정세판단의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부결이 의미를 가지려면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 노사정합의서가 폐기됐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노동자들의 생존을 지켜주지는 않는다. 정부와 자본가들은 민주노총을 배제시키고서라도 이번 합의안의 계획을 그대로 작동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노동자들, 특히 5인미만 사업장이나 특수고용, 미조직 노동자 등 취약계층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투쟁의 힘으로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켜나가지 않는다면 처지는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노총의 노사정 합의안 부결은 투쟁으로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사수하겠다는 투쟁선포의 결의를 담고 있을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노사정합의안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노사정합의가 이루어졌는지조차 모르는 조합원들도 많았다. 부결은 노동자 대중의 문재인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반영했지만, 투쟁의지를 모아내지는 못했다. 그 결과 대회는 민주노총의 상층에서 일어난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부결이 노사정 대화에 불참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대안으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투쟁을 통해 문재인 정부와의 투쟁을 조직하고 확대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대사업장 현장조직들이 합의안에 반대한 진짜 이유
이번 대의원대회에서 중소 영세사업장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경우 부결을 선택한 것이 당연할 수 있겠지만 현대차지부와 기아차지부와 같은 대사업장 대의원들이 합의안에 반대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현대차지부와 기아차지부의 현장활동가조직(현장조직)들은 노사정합의안에 반대한다는 공동의 유인물을 냈다. 이 공동유인물에는 이미 지역적 그리고 업종별 차원에서 노사정협의테이블을 가동시키고 있거나, 가동시키려고 준비하고 있는 자들까지 이름을 내걸었다. 심지어는 가장 노골적인 친회사 세력까지도 동참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의 사업장에서 노동조합 집행부로 올라가면 노사협조주의적인 태도를 취해왔던 조직들이다. 단위사업장 내에서는 자본가들과 협력하는 이들이 밖에서라고 다를까? 이들이 노사정합의와 같은 계급협조의 사회적 합의주의에 진정으로 반대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들이 취약계층 노동자들의 생존을 걱정한 것도 아니다. 솔직히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의 소수를 제외한 이들 대부분은 취약계층 노동자들의 삶에 별 관심이 없다. 그동안 정부와 자본가들이 조장한 ‘귀족노동자’라는 공세가 가난한 노동자층에 먹혀들었던 이유는 대사업장 노동조합이 가난한 노동자들의 생존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그들의 투쟁에 연대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책임에 무관심하거나 회피해 왔던 이들에게 이번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사실 그들이 걱정한 것은 자기 자신들이다. 코로나까지 터진 상황에서 생존의 위협에 내몰린 취약계층 노동자들을 ‘나몰라’라 했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아 고립될 것을 걱정한 것이다. 노사정합의안이 해고ㆍ무급휴직ㆍ임금삭감ㆍ실업 등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담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자본가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있는데 여기에 찬성했다가는 ‘모두가 그럴 줄 알았다고 손가락질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들이 던진 부결표는 계급적 단결과 연대의 정신이 아닌, 오로지 자신을 지키기 위한 행위라고 봐야 한다.
노사협조주의라는 같은 뿌리를 가진 자들
단위사업장 노조관료들의 이해와 김명환과 같은 민주노총 상층관료의 이해가 이번에는 충돌해 반대와 찬성으로 갈렸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노사협조주의’라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 이번에 반대표를 던진 이들이 다음 번에는 찬성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이런 일이 현대차와 기아차 같은 대사업장 노조에서만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번 부결이 계급협조의 사회적 합의주의자들의 준동을 제지했다는 소중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부결자체가 곧바로 현실적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부결이 민주노총의 혁신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위원장 선거를 치른다고 하더라도 더 전투적이고 더 계급의식적인 지도부가 탄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새로운 지도부가 새로운 방식의 노사정협의테이블을 도입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지금 운동의 토양에서는 제2, 제3의 김명환이 탄생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부결을 계급적 단결과 연대의 정신이 확산된 결과라고 결코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 노조관료들의 책임회피에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외피를 씌우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대사업장에서 계급적 단결투쟁운동을 건설하는 것을 요원하게 할 뿐이다. 어렵더라도 현실 속에서 하나씩 디딤돌을 놓는 지난한 작업이 필요하다. 사업장부터 상층까지 층층이 파고든 관료화되고 노사협조적인 기존의 운동을 어떻게 깨뜨리고 새로운 운동을 세워낼지 치열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과제가 더욱 무겁게 우리 앞에 놓여있다.
운동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힘

이번 합의안 반대 속에서 작지만 건강한 계급운동의 씨앗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확실한 계급적 의식은 아닐지라도 정부와 자본의 공세에 맞서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반대표를 던진 대의원들도 있다. 그리고 합의안에 대한 반대를 조직하기 위해 헌신했던 투사들도 있다. 그 수가 적다고 해서 의미가 적은 것은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가 더욱 악화되고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줄 것이 없어질수록 정부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노동법개악 카드를 다시 꺼내든 것을 보라). 이에 발맞춰 노사협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살 길은 자본가들에게 기대는 것 뿐이라며 사회적 대화에 매달려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계급의 힘을 믿지 못하는 관료들이 살아남기 위해 매달릴 곳은 자본의 편에 서는 것뿐이다. 이런 관료들의 통제를 뛰어넘을 수 있어야 노동자 투쟁은 전진할 수 있다. 자본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을 신뢰하는 것, 관료적 지도부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두발로 설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대중의 운동을 조직하고 아래로부터 계급적 연대를 확대하는 것, 이것 말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운동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 사회적 합의주의는 이런 방식으로만 진짜로 깨질 것이다.
김정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