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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동지의 해고와 복직투쟁

“왜 저는 35년 동안 복직을 못하고 있을까요?”

▲ 11월 18일 한진중공업 정문 앞에서 열린 ‘작업복의 꿈, 복직의 희망, 해고 없는 세상, 김진숙과 함께 금속노동자 결의대회’에서 금속노조 부양지부 정혜금사무국장이 김진숙동지의 편지를 대독하고 있다.

 

2020년 11월 18일, 한진중공업 정문 앞에서 마지막 해고자를 복직시키라는 결의대회가 열렸다. 35년 동안 해고자로 살아온 김진숙동지를 정년퇴직 전에 복직시켜 현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열린 결의대회다. 비록, 김진숙동지는 암 재발로 병원에 있어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수천명의 노동자들은 뜨거운 연대의 마음을 아낌없이 보냈다.

해고가 된 까닭

김진숙동지는 최초의 조선소 여성 용접공으로 ‘대한조선공사 선각공사부 선대조립과 용접 1직 사번 23733’을 부여받고 1981년 한진중공업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입사하자마자 상상할 수 없었던 열악한 현장 상황과 마주쳤고, 현장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내식당 하나 없는 현장에서 쥐똥 섞인 도시락을 먹어야 되는 현실에 ‘도시락 거부 투쟁’을 벌였다. 회사는 투쟁 사흘 만에 연말까지 식당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하니까 되더라는 최초의 경험”이후에도 쥐잡기 투쟁, 화장실 투쟁 등을 벌이며 하나씩 바꿔나갔다.
  그러다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면 더 나은 현장을 ‘쟁취’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1986년 노조 대의원에 출마했고 당선됐다. 대의원으로 활동 중 당시 노조 집행부의 비리를 폭로하는 유인물을 제작·배포하다 대공분실에 연행되었고 고문을 당했다. 그 이후에 영도조선소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의 직업훈련소로 출근하라는 부서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부당한 발령, 노조활동 탄압이라며 이를 거부하자 회사는 같은 해 7월에 해고해버렸다. 
  해고가 된 이후 무작정 회사 앞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막아서던 관리자의 ‘이 회사 사람도 아닌데 왜 자꾸 찾아오냐’는 말이 서러웠다고 한다. 해고 통보를 받은 직후에는 금방 다시 일하게 될 줄 알고 회사 경비에게 자신의 물건을 부탁한다는 말까지 했지만, 35년 동안 김진숙동지에게는 공장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해고가 되어도 계속된 투쟁

해고자 신분이 된 이후에도 투쟁을 계속했다. 86년도에 해고되고 87년도 노동자 대투쟁 때 거대한 물결과 함께 싸웠다. 그러나 처음으로 세운 민주노조의 노조위원장이었던 박창수동지가 의문사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장례를 치르려는데 경찰들이 시신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2002년에는 회사측이 일방적으로 임금을 동결하고 650명을 해고하면서 파업이 시작되었다. 회사가 계속해서 단체교섭을 거부하자 당시 지회장이었던 김주익열사는 85호 크레인 올랐다. 김주익열사는 그 위에서 129일을 농성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어서 곽재규열사가 85호 크레인이 있는 4도크에 투신해 숨졌다. 두 명의 동지를 잃고 나서야 정리해고를 막아낼 수 있었다. 정리해고자는 전원 복직하고 남은 해고자 3명 중 2명도 복직했다. 하지만 경총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김진숙동지는 복직에서 제외됐다. 이렇게 2003년까지 이어진 투쟁이 마무리 됐다.
 2010년에 또다시 회사가 400명의 희망퇴직을 통보하고, 이를 거부한 170명을 정리해고 했다. 김진숙동지는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하며 김주익열사와 곽재규열사의 한이 서린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당시 전국에서 수많은 노동자와 시민이 ‘희망버스’라는 이름으로 김진숙동지가 올라선 85호 크레인으로 모였다. 이렇게 수차례 이어진 희망버스는 거대한 연대의 물결도 만들어냈다. 잠정합의안이 도출될 때까지 김진숙동지는 309일 크레인에서 버텼다. 그 날 이후 회사는 더 높은 콘크리트 울타리로 공장을 둘러싸 철옹성을 쌓았고 김진숙동지 자신은 또다시 복직이 미뤄졌다. 

마지막 해고자, 또다시 시작될 해고

그렇게 투쟁해서 식당도 얻어내고, 화장실도 얻어내고, 정리해고도 막아냈고, 희망버스도 겪었지만 정작 자신은 한 번도 식당과 화장실을 이용해본 적이 없다. 해고장을 받았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막막함에 많이 울었지만 투쟁하면서 복직 이야기가 돌때마다 가슴이 뛰었다고 했다. 막막함이 걷히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하얗게 서러운 소금꽃이 피는 동료들과 일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겨서 떨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번번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복직자 대상에 자신은 제외가 되었다. 한번은 회사에서 생계비로 매달 200만원을 주면서 책임을 진다고 했을 때 거절했다. 그 돈을 받으면 자신의 복직이 완전히 포기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직을 시키려면 지금 시키면 되지, 그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진중공업의 마지막 해고자로 남았다. 그러나 본인이 ‘마지막 해고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현재 매각을 이유로 또다시 정리해고 앞에 서 있다.

해고가 된다는 것, 복직을 한다는 것

회사는 쉽게 해고해도 쉽게 복직시켜주지 않는다. 한 노동자가 복직이 된다는 것은 자본가가 이전에 ‘해고’라는 ‘잘못’을 저질렀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노동자를 복직시킨다는 사례를 남기는 것은 자본가들에게 위험하다. 복직을 시키면 ‘끈질기게 싸우면 이긴다’는 것을, 해고자를 복직시키기 위해 투쟁한 ‘노동자들의 힘’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복직을 시키면서 발생하는 비용도 자본가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다. 그래서 한 사업장의 해고자가 자신의 복직을 포기하지 않고 부당한 해고에 맞서는 것은 노동자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보존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해고가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는 계약만료, 업체 폐업 등의 다른 이름으로 해고가 발생하고 있다. 해고가 점점 일상화 되어 가는 것이다. 왜 내가 2년만 일하고 그만둬야 하는지, 일하는 곳의 회사 이름이 옆 동료와 왜 달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도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짜여진 구조 안에서 일하고 있을 뿐이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복직, 부당한 해고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김진숙동지의 복직투쟁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당연해진 해고에도 물음을 던진다.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한 부당함, 해고를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부당함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끝까지 투쟁해서 반드시 현장으로

싸우는 사람들은 한편으로 참 무모해 보인다. 적어도 싸우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여진다. ‘가족들 고생시키지 말고 스스로도 그런 고생하지 말고 다른 일자리 구해서 나가면 되지 왜 생떼를 쓰느냐’고 함부로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단결과 조직을 깨고 위기의 책임을 전가하며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수없이 자행되는 해고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김진숙동지는 싸워오고 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복직을 포기하지 않는 김진숙동지는 수많은 해고와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고 싸우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많은 ‘노동자’들이 더 이상 ‘해고자’가 되지 않고, 이 사회에서 없애야 하는 것을 없애는 투쟁들을 해나가야 한다고 알려주고 있다. 
  “민주노조를 함께 꿈꿨던 동지가 국가권력에 살해되고 크레인에서 죽어 내려오는 나라에선 살아있는 게 오히려 미안하고 내내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 말은 지금 현대건설기계에서 해고되고 투쟁하고 있는 동지들에게 쓴 답장 편지의 일부다. 수많은 풍파 속에서 싸워온 동지의 무거움을 알 수 있다. 
마지막까지 투쟁해서 복직되어 현장으로 들어가 35년 전 현장과 지금의 현장을 두 눈으로 지켜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쫓겨난 현장에서 두 발로 걸어 나올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김진숙 해고자의 복직을 단지 한 명의 복직이 아닌 ‘이 시대의 복직’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게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