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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의 투쟁 - 원산총파업(元山總罷業)

noheflag 2021. 1. 10. 19:22

약 100년 전의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

▲ 1920년대 군산 정미공장. 양복 입은 일본인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들이 가마니 포대를 깔고 앉아 쌀을 고르고 있다. <한겨레>

1920년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로서 조선은 경제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노동자들은 점점 심화되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이유로 곳곳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 및 횡포, 구타, 저임금, 불안정한 고용구조는 흔한 것들이었다. 1920년대 초반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여기저기에서 노동조합이 건설되었고, 노동쟁의는 점점 조직적인 형태를 띠었다. 이에 대응할 필요성을 절감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보안법’을 만들어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압하려 했다. 
1926년 금융공황이 일본 경제를 강타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 운동 세력의 확산, 소작쟁의와 노동쟁의의 증가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위협했다. 예나 지금이나 위기에 대응하는 자본가들의 방식은 같다. 그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공세를 강화하는 것이다. 1920년대 일본 제국주의 자본은 자신들의 어려움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기 위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산총파업이 발생했다. 

 

원산 지역의 노동자들

당시 원산 지역은 부두노동자·토건·일용직 노동자가 대다수였다. 부두노동자들은 ‘도중(都衆)’이라는 ‘동직자 조직’을 만들었다. 우두머리인 십장이 화물주와 관련 계약을 체결하고 노동자들을 배치하고 통제하면서 노동자들의 임금에서 일정한 몫을 떼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40여개의 도중이 연합한 원산 지역 최초의 노동단체인 ‘원산 노동회’(1921년)가 설립됐다. 
 도중을 통해 부두노동자들이 조직되자 개별 자본가들의 노동자들에 대한 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또 노동자들이 특정 회사(개별자본가)에 속하지 않는 부두노동의 특성 때문에 부두노동자들은 지역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해서 조직되었다. 이 때문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개별자본가에 대한 투쟁을 뛰어넘어 지역 전체로 투쟁이 확산될 가능성이 충분한 상황이었다. 
원산노동회는 1925년 1월 객주조합에 대한 파업에서 승리하면서 더 독자적인 조직으로 거듭났다. 이후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로 개편하면서 공장노동자를 포괄하였고, 도중 연합체를 7개의 직업별 조합으로 재편성하면서 조직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 중후반에는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결합하면서 점차적으로 노동자들이 자신을 하나의 계급으로 인식하는 노동자계급적 성격이 더욱 뚜렷해졌다. 

투쟁의 시작점


원산총파업은 1928년 9월 원산 인근의 문평제유공장의 파업에서 시작됐다. 영국인이 경영하는 문평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회사는 지배인과 주요 간부가 일본인으로 평소에도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심했다.
1928년 9월 초, 늘상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욕설과 구타를 일삼았던 일본인 감독 고타마(兒玉)가 조선인 노동자를 심하게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9월 16일, 분노한 노동자 120여 명은 고타마의 파면과 생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에 들어갔다. 9월 28일, 회사측이 노동자들의 요구인 ‘폭행을 가한 감독을 축출할 것, 파업단에서 희생자를 내지 말 것, 파업 중 임금은 회사 측이 4할 지급할 것, 최저임금·해고수당·위자료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공장의 예를 참작하여 3개월 이내에 다시 협의에 응한다’ 등을 받아들이면서 파업은 종결됐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록 회사는 문평제유노동조합과 원산노련를 인정하지 않았고, 단체교섭도 거부했다. 회사는 경찰에게 파업의 주요 인물을 검거하게 하는 한편, 일본인 노동자를 모집하여 작업을 하도록 했지만 그들도 작업을 거부했다. 이에 원산노련은 “최저임금제 확립, 8시간 노동제실시, 대우 개선, 단체계약권 확립” 등을 요구하며 1929년 1월 13일에 또다시 파업을 선언했다.

연대로 이어진 투쟁의 과정

1929년 1월 3일 원산부두노동조합은 대성상회 외 9개 운수회사에 대해서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1월 10일에는 국제통운과 국제운수에 대해서도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1929년 1월 13일 문평제유노동조합의 보고를 받은 원산노련는 긴급집행위원회를 열어 투쟁을 지원하고자 했다. 그래서 임금인상투쟁 중이었던 원산 부두노동자들에게 문평제유공장의 화물을 절대로 취급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또한 파업이 끝날 때까지 금주하면서 매일 조합원 1인당 5전씩을 걷어 파업자금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문평제유 노동자들과 부두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은 지역의 노동자들을 고무했고, 파업는 점차 지역 전체로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이에 일본인 자본가 집단인 원산상업회의소가 대응을 시작했다. 이들은 인천이나 중국의 안동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을 모집해 오도록 하고, 원산유조업조합에 1월 21일부로 원산노련 소속 노동자를 일절 고용하지 않겠다는 통고문을 내도록 했다. 그리고 운수회사는 파업 동조 노동자들에게 해고통지를 내고 문평제유에서도 파업으로 결근하는 노동자는 퇴직으로 간주한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더 강하게 투쟁했다. 대체인력으로 모인 일본인 노동자들도 파업의 대의에 동의하며 파업에 동참했다. 그리고 양복직공조합, 우차부(牛車夫)조합, 인쇄직공조합, 양화직공조합이 파업에 참여함으로써 원산노련 산하 24개 노조의 노동자 2,200여 명이 총파업에 참여했다. 
또한 원산노련은 공동연설회를 개최해 노동자들의 투쟁을 알려냈다. 거대한 규모의 노동자 총파업이 벌어진 것이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생활난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파업 노동자들의 생계를 위해 양식을 배급했다. 전국 각지의 노동조합·청년단체·농민단체 등이 연대를 보내왔고 일본·중국·프랑스·소련의 노동단체들의 격려와 후원이 줄을 이었다. 지역과 나라를 넘어 노동자들의 연대를 이끌어내며 투쟁을 이어갔다. 

▲ 원산총파업 당시 파업노동자들 <동아일보>사진

 

자본의 반격
 
 자본가들이 반격에 나섰다. 먼저 원산상업회의소는 운수관계 자본가들로부터 어용노동단체 설립자금을 마련하고 폭력배를 모아서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동단체를 조직했다. 그리고는 원산노련을 파괴하기 위해 원산노련에서 탈퇴하여 함남노동회에 가입하는 자만을 고용한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경찰은 모든 집회와 선전물 배포를 금지시켰고 원산노련 산하 각 조합을 수색하고 문서를 압수했으며, 집행위원장 등 주요 간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했다. 그리고 2월 중순부터는 300여 명의 경찰이 원산노련 회원의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며 공포감을 조성했다. 2월 말에는 총독부가 나서서 원산 사건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언론을 공개하면서 원산노련을 위협했다. 총독부는 훈련이라는 명분으로 군대까지 동원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총파업 직전에 조선공산당 검거 사태로 원산노련을 지원하고 있었던 원산지역 사회주의자들이 대부분 검거되었다. 그래서 원산노련은 지도력이 취약해진 어려운 상황에서 총파업을 이어가야 했다. 결국 원산노련의 지도부가 보다 타협적인 인자들로 교체됐다. 새로운 지도부는 자본가들의 위협에 맞서기 보다는 교섭과 타협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4월 1일부터 3일간 노동자 10~20여 명이 함남노동회 등을 습격하여 수십 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명분 삼아 경찰은 더욱 거세게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결국 4월 6일, 전체 집행위원 30명 중 11명 참석한 집행위원회의 결정으로 원산노련 지도부는 노동자들에게 복귀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80일 간에 걸친 원산총파업이 끝났다. 이후 원산 고용자 단체의 탄압으로 원산노련은 해체됐다. 

▲ 치안유지법 하에서 일으킨 원산 부두노동자 총파업을 다룬 <조선일보> 기사


원산 총파업의 결과와 영향

원산총파업은 패배했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은 교섭과 타협만으로 노동자들의 요구를 관철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 타협주의적 지도부의 노선의 위험성도 알게 됐다. 또한 원산총파업은 비록 패배했지만, 직종을 넘어서 한 지역의 모든 노동자들이 참여한 동맹파업을 통해 노동자들로 하여금 전국적 산업별노동조합 건설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했다. 한편으로 노동자들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 지도력을 갖춘 당(조선공산당 재건)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졌다.  
한편, 원산총파업 때 중소 조선인 자본가들과 민족 부르주아지들이 ‘조선인’ 노동자 편이 아니라 ‘일본’ 대자본가들의 편에 서는 것을 보면서 노동자들은 ‘식민지’ 노동자들에게도 ‘민족’보다는 ‘계급’의 적대선이 더 본질적이라는 것을 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됐다. 그래서 노동조합운동의 혁명성이 강해지는 계기점을 마련했다.  
원산총파업이 지부의 타협주의로 끝을 맺었지만 80여 일 동안이나 파업을 지속시켰던 노동자들의 투쟁의 원동력을 완전히 지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당초 노동조합과 노동연합회 박멸을 목표로 했던 자본과 권력의 구상은 실패했다. 파업 패배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원산노동연합회의 재건이 시도되어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1929년 12월 23일 원산노동연합회 정기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총파업 이후 어쩔 수 없이 함남노동회에 가입한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안에서 노동조합의 민주화와 자주성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했다.

오늘날에 원산총파업 바라보기
 
원산총파업은 패배했지만, 그리고 지역과 직종 그리고 민족적 한계를 넘어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는, 단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연 소중한 역사적인 경험이었다. 자본주의라는 틀이 깨질 때까지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투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투쟁의 경험 속에서 노동자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위대한 계급으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해 갈 것이다. 이것이 원산총파업이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노동자들에게 주는 교훈일 것이다.

 

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