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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은 망했어도, 이준석의 차별과 혐오의 정치는 자본주의와 함께 살아남을 것

noheflag 2022. 7. 17. 18:58

 

이준석 당대표가 역풍을 맞았다. 지난 7일, 국민의힘(이하 국힘) 윤리위원회는 이준석 대표가 “성접대 증거인멸을 교사”해 ‘품위유지 의무’를 위반했다며 ‘당원권 정지 6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경찰은 이준석 대표가 아이카이스트 김성진 대표로부터 두 차례의 성접대와 향응을 제공받은 혐의로 그를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준석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국힘 윤리위원회는 경찰이 조사 중인 성접대 혐의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했다. 다만 이준석 대표가 김철근 당대표 정무실장을 시켜 장**씨를 만나 “성접대 사실이 없다”는 사실확인서를 받고 ‘7억원을 투자하겠다’는 약속증서를 써주었다는 것을 근거로 이준석 대표를 징계했다. 
그런데 요상하다. 위의 정황으로 보면, 이준석은 받지도 않은 성접대 사실을 덮으려고 장**씨에게 7억을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야 할 딱한 이유가 있는가? ‘구설수에 휘말리는 게 성가신 일’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굉장한 부자라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경찰조사에서 성접대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는 것은 국힘의 당권 경쟁의 향배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이준석은 ‘보수혁신’의 아이콘이었다. 2021년 6월, 이준석은 당원들의 지지가 아니라,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 당대표가 되었다. 특히 2030 남성들의 지지가 그의 당대표 당선에 한몫했다. 그는 “변화와 공정”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런데 그의 정치가 무엇이기에 돌풍을 일으키며 그가 국힘의 당권을 거머쥐게 해주었을까?


이준석의 차별과 혐오의 정치


이준석이 당권을 잃고 추락하는 마당에 새삼스럽게 그의 정치를 들여다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만들어 놓은, 그래서 현실에 존재하는 ‘차별과 혐오’가 이준석이 주장하는 ‘변화와 공정’이라는 필터를 거치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이준석의 “변화와 공정”은 희안하다. 이준석은 ‘공정’을 기치로 ‘차별과 혐오’를 조장한다. 이준석은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이 사회의 차별받는 이들에 대해 차별과 혐오를 조장한다. 심지어는 그들을 가해자로 둔갑시킨다. 구체적으로는 여성, 동성애, 장애인에 대해 이준석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그러면 그의 정치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준석의 정치①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

▲ 여성이 받는 차별은 여전히 존재하나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입장을 앞세워 이준석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며 차별을 강화하고 있다.


이준석은 “여성이 교육과 직업의 기회에서 배제되었던 것은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일 뿐, 지금의 여성들은 동등한 기회를 가진다”고 말한다. 이런 어이없는 말을 하다니, 그는 외계에서 온 생명체가 분명하다. 
그런데 현실의 여성들은 이준석의 주장과는 다르게 차별받는다. 여성들은 동등한 조건의 남성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는다. 채용과 진급에서도 남성보다 불리하다. 출산과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고, 맞벌이를 하는 경우에도 가사노동을 남성보다 더 많이 떠맡는다. 이것이 여성차별의 현실이다. 그런데 이준석의 눈에는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고의적으로 무시한다.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다는 전제로부터 이준석은 ‘여성할당제’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할당제는 차별을 철폐하는 근본적인 조치가 아니다. 할당제는 차별을 전제로 그것을 완화하려고 하는 조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실행되는 할당제는 차별을 고착화하고 그것을 합리화하는 용도로 이용된다. 
그런데 이준석은 이것마저 부정한다. 연장선에서 그는 여성가족부의 폐지를 주장한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은 이준석의 강령을 채택해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윤석열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지 못했다.  
이준석은 여성할당제를 “남성의 것을 빼앗아 여성에게 주자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남성들이 역으로 차별받고 있다고 한다. 이준석의 논리에 따르면 이 말이 맞다. 이준석의 논리에서는 여성이 차별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들에게 주어진 할당(토큰)은 특혜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이준석은 여성과 남성을 갈라치기 한다. 이준석이 여성과 남성을 갈라치는 목적은 물론 선거에서 이득을 얻고자 함이다. 그것 이상은 없다. 그가 국힘의 당대표가 된 것은 이런 갈라치기로 얻는 2030 남성들의 지지가 한몫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찮았다. 윤석열은 2030 남성들의 표를 더 많이 얻었지만, 역으로 여성들의 표를 더 많이 잃었다. 이 신통찮은 결과가 국힘 내에서 이준석의 입지를 좁게 했고, 지금 그를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이준석은 “남녀의 공정한 경쟁을 확립”하자고 한다. 그런데 존재하는 차별을 무시하고 주장하는 ‘공정’이란 ‘차별의 지속을 확립’할 뿐이다. 존재하는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차별을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고 실행할 수 없고, 때문에 차별이 개선되기를 기대할 수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준석에게는 사회적 차별을 해결할 대안이 전혀 없다. 대신에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고 오히려 그것을 확대함으로써 그 개인의 출세와 그가 속한 정당의 이득을 도모할 뿐이다. 

 

▲ 지난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에 대한 차별금지와 성평등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그런데 2030 남성들은 왜 이준석의 차별과 혐오 정치에 빠져드는가?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 2030 세대들이 그렇다. 비좁은 취업문이 이들을 궁지로 몰고 있다. 이준석은 궁지에 빠진 이들의 절박한 심리를 아주 영리하게 이용했다. 이준석의 ‘역차별’과 ‘공정경쟁’ 주장이 2030남성들을 사로잡았다. 이준석은 마치 할당제로 특혜를 받는 여성들 때문에 젊은 남성들이 곤경에 처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할당제를 없애고 공정한 경쟁을 확립’하면 2030남성들이 앞이 캄캄한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할당제로 배당된 몇 개 안 되는 여성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2030남성들의 취업난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개선되는 것도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보자면 이준석의 주장대로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공정한 경쟁’이 2030 세대들의 일자리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취업하려는 사람들이 100만 명인데 일자리가 10만 개밖에 없다면, 아무리 ‘공정한 경쟁의 규칙’을 도입한다고 하더라도 90만 명의 실업자를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준석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정치가 해내는 중요한 사회적 역할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일자리 부족과 생존의 어려움’이라는 자본주의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남녀의 갈등 문제로 돌려버리게 한다.
그런데 이준석의 차별과 혐오의 정치는 여성차별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차별과 혐오의 정치는 동성애 등 성소수자나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로 확대된다.

이준석의 정치② 동성애에 대한 반대, 동성애를 싫어할 권리 


이준석은 동성애를 반대한다. 그런데 그는 동성애자가 차별받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싫어하는 것을 싫어할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준석은 동성애 차별의 문제를 무슨 음식에 대한 기호의 문제인 것처럼 말한다. 그는 ‘동성애를 싫어하는 것’은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고 말한다. 개떡같은 논리다. 
그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올라타서 그런 편견을 가진 사람들의 편에 선다. 그리고 그들을 옹호한다. 다수가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가지는 것에서 차별이 확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하버드 대학을 나온 수제인 이준석은 도무지 알지 못한다. 아니 모른 체 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확산시키면서 동성애에 대해 편견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내려고 한다.

이준석의 정치③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제21회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인 4월 20일,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에게 장애인차별혐오상을 수여했다.


이준석은 장애인에 대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취한다. 지난 4월 전국장애인 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가 지하철 승강장을 점거하고서 정부에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전장연의 시위에 대해 이준석은 “최대 다수의 불편을 볼모”로 한 “비문명적 불법”시위를 “무조건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왜 장애인들이 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는지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정부가 장애인 예산을 삭감해서 장애인들이 기대했던 지하철 역사의 엘리베이터 설치가 기약없이 미뤄졌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장애인들과 불편을 겪는 다수를 나누고 갈라치면서, 불편을 겪는 다수의 비장애인들에게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갖게 한다.   
차별받고 억압받고 착취받는 ‘노동자들여성들성소수자들장애인들’이 그들의 요구들을 알리고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도로를 점거하고, 지하철 승강장을 점거하고, 공공건물들과 공장을 점거하는 시위행위는 확실히 불특정 다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가 그들 시위자들의 요구나 주장을 납득하고 거기에 동의하면 그들은 불편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그 시위자들에게 지지를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준석이 ‘비문명적인 불법’이라 규정한, 불특정 다수의 불편을 야기하는 ‘집단적 시위나 점거’는 모든 문명국가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온 대단히 잘 알려진 방식이다. 그들 자신들도, 극우단체들도 그런 시위를 한다. 

이준석은 트럼프의 아류일 뿐


이준석의 차별과 혐오의 정치에는 현실의 차별을 개선하려는 대안이 전혀 없다. 그가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을 남성에 대립시키고, 장애인을 비장애인에 대립시키고, 동성애자를 이성애자에 대립시킨다. 그리고 그는 남성이 여성 때문에, 비장애인이 장애인 때문에, 이성애자가 동성애자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여성과 성소수자와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조장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남성과 비장애인과 이성애자의 지지를 얻어내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류의 차별과 혐오의 정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계급의 지배와 착취를 위해 오랫동안 이용되어 온 것이다. 이준석이 혐오해 마지않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다는) 할당제는 자본주의 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가려주는 무화과 잎사귀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준석은 이런 무화과 잎사귀마저 뜯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이준석과 다르게 다수의 사람들은 무화과 잎사귀가 뜯어져서 소중한 부분이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 할 줄은 안다. 그러나 이준석은 부끄럼을 모른다. 
차별과 혐오의 정치에서 이준석은 아류에 불과하다. 원조는 미국의 트럼프다. 트럼프는 남미와 아시아의 이민자들이 백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갔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트럼프는 미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차별과 푸대접을 받아온 이민자들을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백인들 특히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궁지에 몰린 백인 남성들을 피해자로 둔갑시켰다. 그리고 백인들 사이에 남미와 아시아 등의 유색인종과 흑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추겼다. 
트럼프의 차별과 혐오의 정치를 부끄러워 하면서도 트럼프 지지하는 이들을 ‘샤이(부끄러운, 수줍은) 트럼프’라고 부른다. 트럼프의 차별과 혐오의 정치를 지지하는 것이 부끄러운 짓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부끄럼을 아는 백인 남성들의 지지 덕분에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그 덕에 트럼프를 모범으로 삼는 이준석과 같은 아류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준석은 여성을, 동성애자를, 장애인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정치를 통해 국힘의 당권을 장악하고 더 한 출세도 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준석의 차별과 혐오 정치는 트럼프의 그것만큼 그렇게 효과적이지만은 않았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은 이준석의 차별과 혐오의 강령에 따랐지만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그는 2030 남성들의 더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여성들의 지지를 그만큼 잃어야 했다. 트럼프는 유권자들 중 백인들이 유색인들에 비해 훨씬 많다는 것을 계산해 넣었지만, 이준석은 여성과 남성의 숫자가 엇비슷하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못했다. 그래서 이준석의 차별과 혐오의 정치가 선거에서 별로 약발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큰 차이로 무난하게 이길 줄 알았던 선거에서 윤석열은 간발의 차이로 이겼다. 물론 여기에는 윤석열과 갈등을 빚었던 이준석의 자해공갈적인 몽니정치도 한몫했다.  
그래서 이준석의 당내 입지가 그만큼 좁아졌다. 당대표에 대한 당윤리위의 징계 처분에도 이준석이 고립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성접대 의혹에만 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국힘이 그렇게 윤리적인 당은 아니잖은가! 국힘이 이준석과 함께 한 차별과 혐오의 정치가 윤리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잖은가!

 

▲혐오 정치로 지지자층을 결집시켰던 트럼프와 이준석의 정치는 닮음꼴이다. 하지만 차별과 혐오에 기반한 정치는 한계가 분명하다.

차별과 혐오의 정치는 자본주의가 끝나야 끝날 것


국힘의 당권은 권성동이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당권을 두고 권성동과 장제원의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는데, 찬찬히 들여다 보면 이들이 이준석의 성접대 의혹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성동은 국힘의 윤리위원회를 움직여 이준석 대표에 6개월 당원권 정지 결정을 내리게 했다. 이 결정에 따르면 이준석은 6개월 후에 다시 당대표로 복귀할 수 있다. 그러면 이준석은 내년 4월까지의 임기를 마칠 수 있다. 하필이면 이때가 권성동의 원내대표 임기가 끝나는 때다. 권성동이 내년 4월이면 국힘 당권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려면 그때까지 경찰조사에서 이준석의 성접대 의혹이 밝혀져서는 안 된다. 이것이 권성동이 바라는 바다.
그런데 권성동에 당권을 내주기 싫은 장제원은 6개월 후에, 그전에라도 전당대회를 치러서 새로운 당대표가 선출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막강한 경쟁자인 권성동이 당권에 도전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장제원은 안철수를 밀어 당대표를 만들고, 자신이 2인자로서 실제로 당을 지배하는 모양새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장제원의 뜻대로 되려면 이준석의 당대표 자격이 박탈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6개월 내에 경찰조사에서 이준석의 성접대 의혹이 밝혀져야 한다. 
이들에게 진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권성동의 당권장악 계획에서는 이준석의 성접대 의혹의 진실이 밝혀져서는 안 된다. 밝혀지더라도 자신이 당대표가 된 이후에 밝혀져야 한다. 물론 장제원도 진실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에게 진실이 밝혀져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그의 당권 장악에 절대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힘의 당권을 누가 장악하게 되든 이준석의 시대는 짧게 막을 내렸다. 이준석이 다시 당권에 도전할 수 있으려면, 그의 경쟁자들이 그의 성접대 의혹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것을 돌파할 수 있는 신묘한 능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준석의 차별과 혐오의 정치가 막을 내렸는가? 여성에 대한, 성소수자에 대한, 장애인에 대한,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자본가계급의 분열 지배 전략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노동자 계급을 남성과 여성으로,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로, 비장애인과 장애인으로, 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로 분열시켜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은 자본주의 자본가계급의 착취 본성으로부터 나온다.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의 단결을 방해하고 분열시킴으로써 그들의 지배를 영구화화려 한다. 때문에 자본주의가 폐절되지 않은 한 차별과 혐오의 정치는 더 노골적이냐 덜 노골적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준석은 더 노골적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준석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 성접대와 필연적으로 확실히 만나고 있다. 

 

김정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