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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삼호중공업 블라스팅 노동자 ‘가짜사장’이 아닌 ‘노동자’가 됐다!

noheflag 2023. 2. 8. 11:32

현대삼호중공업 블라스팅 노동자들이 작업거부 38일 만인 1월 18일(수) 4대보험 보장과 전원고용보장에 합의했다. 이날은 조선업종/호남권 금속노조 결의대회가 계획되어 있었으나 잠정합의 소식에 결의대회는 취소되었다.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던 투쟁과정을 거치며 힘겨웠을 블라스팅 노동자들에게는 설명절전 합의는 너무나 큰 선물이었다. 한 달이 넘어가면서 생계 압박이 시작되었고 일부 동료들의 복귀소식으로 투쟁대오가 흔들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대부분 관철되고 설전에 투쟁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지역과 전국에서 많은 연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소중한 연대와 더불어 돈보다는 노동자로 인정받기를 선택하고 장기투쟁을 각오하며 자신들의 투쟁대오를 추슬러왔던 블라스팅 노동자들의 강한 의지가 없었다면 승리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더 일찍 끝날 수도 있었다

 

블라스팅 노동자들의 작업거부는 작년 12월 12일(월)에 시작됐다. 애초 임금삭감없는 4대보험 보장을 요구했지만, 이들은 12월 24일(토) 사측이 제시한 현대중공업 블라스팅 시급기준(4대보험 보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기존 물량제로 받았던 월급여에 비하면 170여만원이 줄어드는 임금안이었지만 가짜사장님으로는 더 이상 살수 없다는 소망이 더 컸기 때문에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 2022년 12월 25일부터  26일까지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현대중공업그룹 R&D센터 앞에서 텐트농성과 결의대회를 진행했다.


그러나 갑자기 사측의 태도가 바뀌었다. 대화는 중단되었고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이미 계획했던 현대중공업 R&D 센터(현대중공업 GRC) 앞 1박2일(25일 ~ 26일) 텐트농성을 강행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12월 26일(월)에 ‘창사 50주년 비전선포식’을 성대하게 열고자 했으나 블라스팅 노동자들과 현대건설기계 서진해고자들의 공동집회에 막혀 실내행사로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제시한 안을 받아들였음에도 합의를 거부한 사측의 말도 안 되는 행태 때문에 블라스팅 노동자들의 투쟁은 해를 넘겨서 더 진행됐다. 

누가 더 버틸 것인가!


아무리 길어도 한 달이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워낙 위험하고 숙련도가 중요한 특수직종이다보니 전국적으로도 블라스팅 노동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더욱이 1만3천명이 넘는 현대삼호중공업 노동자 중 선행도장 블라스팅 노동자는 4개 업체에 고작 60여명에 불과하다. 그중 38명이 작업거부 중이었으니 공정지연은 불가피했다. 
물론, 원하청 사측은 4~50만원의 일당을 주면서까지 대체인력을 구해 빈자리를 채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대체인력 구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대불산단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현대삼호중공업 블라스팅 노동자들의 작업거부투쟁을 지지하며 대체인력으로 일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사측이 대불산단(현대삼호중공업 근처에 위치한 산업단지로 선박블록공장들이 많다)의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투입시키고 울산과 거제에서 대체인력을 구해 투입시켰지만 공정지연은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기존 블라스팅 노동자들의 작업능률과 품질을 따라갈 수 없었고 야드에는 전처리를 기다리는 블록들이 쌓여만 갔다. 
첫 합의시도가 무산되고 해를 넘기면서 이제는 누가 더 질기게 버티느냐가 핵심이었다. 사측으로선 손실을 보더라도 대체인력을 더 투입시킨다면 투쟁하는 블라스팅 노동자들을 무릎 꿇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정지연으로 인한 손실은 선행도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후행공정은 물론 선행공정 전체가 마비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원청인 현대삼호중공업은 공장안에서 작업이 안 되자 대불산단으로 블록을 빼돌려 작업하려고 했으나, 이 또한 대불산단 블라스팅 노동자들이 현대삼호중공업 물량은 하지 않겠다며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즉, 배 이상의 인건비 부담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정지연에 따라 선박인도까지 늦어지게 된다면 38명을 쳐낸 대가치고는 너무나 큰 대가를 치려야 할 판이었다. 

장기투쟁을 각오하고 투쟁전선을 넓히다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이제 장기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70여만원에 달하는 임금손실을 받아들이면서도 4대보험 보장을 요구했던 블라스팅 노동자들에게는 누구보다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 게다가 사측이 낸 임금안을 받아들였음에도 사측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이를 도대체 누가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1월 9일(월)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현대삼호중공업 정문 앞과 서문 앞에 천막을 설치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특별근로감독을 요구했음에도 묵살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는 고용노동부 목포지청 항의 투쟁과 시민 선전전을 더욱 강화했고, 1월 11일(수)부터는 연대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거제도와 울산으로 2박3일 순회투쟁도 진행했다. 현대삼호중공업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대우조선과 현대중공업에 직접 방문해 스스로의 투쟁을 알려내고 연대를 호소했다. 
이 과정은 투쟁을 하고 있는 블라스팅 노동자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전라도 영암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조선업 전체로 시야를 확대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고 자신들의 투쟁이 얼마나 정당한지 다시금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교훈

▲ 2023년 1월 18일 오후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3개 업체와 4대보험 보장, 현장복귀를 합의했다.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훌륭하게 싸웠다. 1998년 한라중공업 사내하청노조가 납치, 폭행, 협박에 무참히 깨진 이후 파워 노동자들이 연 포문으로 하청노동자의 투쟁이 꽃망울이 맺혔다. 그러나 지금은 훌륭했을지라도 다음 투쟁을 똑같이 할 수는 없다. 노동자가 투쟁한 만큼 자본도 배우고 대비하기 때문이다. 
사측이 스스로 제시한 임금안을 걷어찬 가장 큰 이유는 투쟁하는 노동자들 내부의 분열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함께 투쟁을 해오던 한 팀이 흔들렸다. 투쟁일정에 참여하지 않고 어떻게 할 것인지 장고에 들어간 이 팀은 결국 1월 9일(월)부터 9명 중 8명이 현장에 복귀해버렸다. 투쟁대오 내의 분열은 가장 큰 약점이 된다. 심지어 자본은 투쟁대오를 깨기 위해 이를 조장한다. 개인에게 직접 연락해 회유하고 가족에게까지 연락해 투쟁하는 노동자를 압박한다. 이 모든 과정을 블라스팅 노동자들이 겪고 있었다. 결국,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의 단결이다. 아무리 유리한 전쟁에서도 내부가 분열되어 있다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반드시 극복해야할 과제가 있다. 작년 9월 파워 노동자들의 투쟁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 블라스팅 노동자들의 투쟁도 공식적으로는 하청노조로 싸운 것이 아니다. 금속노조 광전지부가 관장하며 투쟁을 이끌었고, 정규직노조인 현대삼호중공업지회가 적극적으로 엄호했지만 정작 합의주체는 업체별 노동자대표였고 공식적으로 전남조선하청지회는 합의주체가 되지 못했다. 다음투쟁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방식의 마무리가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또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투쟁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점이다. 두 번의 투쟁이 모두 현장 밖에서 진행됐다. 어쩔 수 없었던 이유와 한계가 있었지만 다음에도 이런 방식의 투쟁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현장과 결합되지 않는 투쟁은 타직종의 하청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없게 만든다. 즉, 자신만의 투쟁으로 갇힐 수 있다. 지금은 자신만의 요구로 싸웠다면 다음엔 더 많은 하청노동자의 요구로 싸워야 한다. 노동자에게 가장 큰 힘은 단결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블라스팅 노동자들이 체결한 합의서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합의이행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즉시복귀하기로 합의됐던 인원 중 2명의 복귀를 업체가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에는 이번 투쟁에서 가장 앞장섰던 노동자 대표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이전에도 산발적인 투쟁을 계속 해왔었다. 매번 작업거부 형식의 투쟁은 업체별로 팀별로 진행됐고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주동자’는 블랙리스트에 걸려 복귀조차 못하고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반드시 ‘전원복귀’를 쟁취하려고 했고, 사측이 마지막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쟁점이었다. 만약 합의서 이행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블라스팅 노동자들은 또다시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현장에 복귀한 블라스팅 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고 강력한 투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사측이 위험을 감수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단 한명의 동지도 버리지 않겠다는 각오로 끝까지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블라스팅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정규직노조인 현대삼호중공업지회와 금속노조 광전지부의 역할을 빼놓을 수는 없다. 말로만 외치는 원하청 연대가 아닌 몸소 실천으로 보여줬던 동지들의 진심을 많은 하청노동자들이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더 많은 조선소 하청노동자를 조직하고 더 큰 원하청 연대투쟁으로 전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윤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