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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전세사기 피해, 전세사기는 자본주의가 만든 재앙이다

noheflag 2023. 5. 4. 23:55

지난해부터 전세사기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서울, 인천, 부산,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규모의 전세사기 피해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지만, 정부와 지자체, 정치권은 피해 규모조차 추산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사실상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러다 최근 인천 미추홀구에서 발생한 전세사기 피해자 세 명이 연이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다. 피해 규모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피해자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지경에 이르자, 손을 놓고 있는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고 대책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화들짝 놀란 정부가 부랴부랴 대책을 발표하고 국회에서는 특별법을 논의하고 있지만, 전세사기로 전 재산을 잃게 된 피해자들을 구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졸속적 대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개인문제라 책임이 없다는 정부여당

 

정부와 여당인 국민의힘은 전세사기 문제가 ‘개인 간의 문제’라고 선을 긋고 사회적 책임을 거부하고 있다. 정부의 주택정책을 총괄하는 국토교통부 원희룡장관은 ‘전세사기 피해 지원을 위한 특별법’ 논의를 위해 4월 28일 열린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피해자가 속아서 사기를 당한 경우 그 피해금액을 국가가 먼저 대납해주고 다른 곳에서 충당하는 제도는 있지도 않고 선례를 남겨서도 안 된다”며 “모든 사기 피해는 평등하다”고 말하며, 보증금 채권 매입 등의 방식으로 피해자를 구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이에 앞서 25일 부산전세피해지원센터를 방문한 자리에서 부산지역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국가가 피해를 먼저 보상해달라는 요청에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하는 건데, 세금 낸 사람들이 과연 동의하고 국민적인 동의가 되겠느냐”면서 “세입자 입장에서 ‘이왕이면 보증금까지 돌려주지’ 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예산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로 주식이나 가상화폐에 빚투(빚내서 투자)’를 하다가 손실을 본 청년들의 재기를 돕겠다며 세금으로 이자 감면과 상환 유예를 지원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대해 개인이 결정한 투자로 인해 발생한 손실을 정부가 세금으로 지원해서는 안 된다는 엄청난 반발 여론이 일었다. 전세사기를 개인 간의 문제로 치부하는 무책임한 태도는 차치하더라도, 빚투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고, 따라서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절차는 불필요하다는 게 윤석열 정부의 주장이란 말인가? 최소한의 일관성도, 책임감도 없는 정부의 태도에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회적 재난이라는 야당


민주당, 정의당 등 야당과 일부 시민사회단체는 전세사기로 인한 피해 규모가 크고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재난으로 규정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정부와 여당의 무책임한 태도보다는 진일보한 태도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문제해결을 위한 정확한 원인분석과 해결방안을 도출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재난을 ‘뜻밖에 일어난 재앙이나 고난’으로 규정하고 있다. 자연재해나 사고, 전염병 확산으로 인한 피해를 ‘사회적 재난’이라고 한다. 전세사기 피해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고,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재난’에 가까운 결과를 빚어내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전세사기가 벌어진 원인이 ‘예측할 수 없는 뜻밖의 일’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을까?

부동산 가격이 한창 과열되던 2017년, 문재인 정부는 무주택자 전·월세 주택 공급 방안으로 민간임대사업자 등록을 장려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구매력 있는 사람들이 집을 많이 사서 ‘주택 시장’에 전·월세 물량 공급을 늘리도록 유인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임대주택 등록 사업자들에게 각종 세제와 금융지원을 제공하고 규제를 풀어줬다. 소자본, 심지어 무자본으로 전세를 끼고 주택을 매입하는 행위를 ‘갭투자’라 치켜세우며, 사람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 소개됐다. 이 과정에서 소위 말하는 ‘빌라왕’이 태어났다.

당시에도 이미 이런 방식의 투자가 부동산 경기가 침체에 접어들면 깡통전세(매매가 대비 전세가가 같거나 높은 전세)로 쏟아질 것이라는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와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무시했다. 지난해부터 부동산 경기가 본격적으로 침체에 접어들면서 그 우려는 현실이 됐다. 지금의 전세사기 문제는 ‘뜻밖의 일’이 아니라 충분히 예측가능 했던, 예견된 결말이다.

자본주의가 만든 재앙


더 큰 문제는 전세사기로 인한 피해가 지금이 끝이 아니라 앞으로 더 확대될 것이라는 점이다. KBS가 50채 이상 다주택자 2,659명을 분석한 결과 전세사기와 연계된 빌라왕은 176명이고, 이들이 소유한 주택은 모두 26,968채로 확인됐다. 176명 가운데 주택도시보증공사가 악성 임대인으로 분류한 인물은 50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126명은 관리대상도 아니다.

이들은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주택을 매입했고, 특히 2020년엔 7,110채, 2021년 8,929채, 2022년 3,736채를 매입했다. 통상 전세 계약이 2년으로 이뤄지는 것을 감안하면 올해 최대 8,929채의 전세 만기가 도래할 것이고, 전세사기 피해 추정액은 최대 1조 8,544억 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 전세사기 피해 추정액은 최대 7,759억 원이다. 지금도 자신이 전세사기의 피해자인지 조차도 모르는 피해자가 있고, 그 피해규모가 어느 정도까지 확산될지도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이런 저런 대책과 특별법을 쏟아내고 있지만 ‘백약이 무효’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전세사기가 가능하게 만든 핵심적인 원인은, 이익을 위해서 집조차도 ‘사고 파는 상품’으로 만든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인데 이것을 그대로 두고 인간의 탐욕만 조절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집이 경매에 계속 넘어가자 윤석열은 피해자들의 집에 대한 경매를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 다음날에도 경매는 진행됐다. “당신들에게는 재산증식 기회겠지만, 우리에게는 보금자리다.”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인천 미추홀구 피해자들이 집 문 앞에 내 건 처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경매꾼들에게는 “싼 값의 경매 매물이 쏟아져 호재”인 현장일 뿐이고,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이익으로 삼는 것에 대한 도의적 비난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돈벌이만 된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인 의식주조차도 얼마든지 사고 팔 수 있는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이번과 같은 전세사기를 완벽히 막는 정책이 시행되더라도 투기꾼들은 또 다시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할 것이다. 집은 사는 ‘곳’이어야 한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바람은, 집은 사는 ‘것’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이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