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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 이란 격돌의 원인과 점점 기울어가는 제국주의

noheflag 2024. 5. 1. 14:59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부와 이란의 이슬람 신정정부가 사기극을 벌이는 동안 유가가 상승하고, 주가가 하락하고, 미국의 국채값이 급등하고, 세계인들을 긴장시킨 것은 중동의 석유-에너지 자원이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그 만큼 크기 때문이다. 이란과 이스라엘이 전면적인 전쟁에 돌입하고, 중동 국가들이 분열하면서 전쟁에 휘말려 들어가고, 미국과 ‘중국·러시아’가 이 전쟁을 지원하게 되면 3차 유류파동이 발생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쟁이 중동을 넘어 세계로 확산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일부 성급한 자들은 3차세계대전에 대한 시나리오를 내놓기도 했다. 

두 숙적?


앞의 글에서 우리는 이란과 이스라엘이 ‘숙적’이라고 표현했다. 어학사전에서는 ‘숙적(宿敵)’을 ‘오래전부터의 원수-적(敵)’이라고 적어놓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이란이 항상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동에서 이스라엘은 미제국주의의 창과 방패의 역할을 했왔다. 최근에 네타냐후 정부가 바이든 정부의 말을 곱상하게 따르지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미제국주의 ‘도사견-싸움개’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미국·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이란과 맺는 관계에 따라 이란과의 관계가 그 양상을 달리했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란만장했던 이란의 근현대사’를 아주 대충이라도 훑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미국은 선이고 이란은 악의 축이라는 편협한 세계인식’에서 벗어나 좀 더 객관적으로 이들 사이의 관계를 조망해 보아야 한다. 

주마간산(走馬看山)- 이란 역사 엿보기

▲ 1946년 영국과 소련의 이란 내 석유이권 영향력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옛 소련) 등 서방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중동의 석유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중동을 ‘분할·지배’해 왔다. 일찍부터 이란의 석유자원은 영국이 약탈해 갔다. 이때 이란은 페르시아로 불렸다. 20세기 초 영국은 이란의 ‘다시가 카자르’ 왕조와 결탁해 이란의 석유를 60년간 무상으로 채굴할 권리를 얻었다. 이란의 이슬람 성직자들과 이란 민족주의자들은 여기에 반발했다. 
1919년 이란의 육군 장교 ‘레자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카자르 왕조를 몰아냈다. 레자 칸은 이슬람 성직자들과 이란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지만, 영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레자 칸은 페르시아를 민주공화국으로 바꾸고자 했으나 그렇게 되면 이슬람 성직자들과 이란 민족주의자들이 권력을 얻게 되어 자신들의 석유이권을 빼앗길 것을 염려한 영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제국주의 영국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늘날 다수가 믿는 바와는 다르게 민주공화국의 정치체제가 아니라 석유자원이었다. 결국 1925년 레자 칸은 왕위에 올랐고, ‘팔레비’ 왕조가 시작됐다. 
이때 이란의 이슬람 성직자들과 이란 민족주의자들은 석유이권을 영국으로부터 빼앗아 오고자 했으나, 그것이 쉽지는 않았다. 
팔레비1세는 근대화를 추진했는데, 이때 미국과의 관계도 상당히 가까워졌다. 팔레비1세는 근대화와 세속화를 추진했는데, 세속화에 반대한 이슬람 성직자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팔레비1세는 1935년 국호를 이란으로 바꿨다. 
이란의 팔레비1세는 2차세계대전에 참전하지는 않았는데, 독일과 협력해서 영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당시 이란에 집중되어 있던 철도는 연합국이 전쟁물자를 수송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는데, 팔레비1세는 소련의 전쟁물자 수송을 거부했다. 여기에 이란인들의 반영 폭동까지 일어났다. 
1941년 위기감을 느낀 영국이 소련과 연합해 팔레비 왕조를 공격했고, 결국 팔레비1세는 축출당했다. 이후 영국은 레자의 아들 무하마드 팔레비를 왕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팔레비2세다. 팔레비2세가 왕이에 오르면서 다시 친서방 정책을 폈다. 
그러나 당시 여전히 반서방, 특히 반영 정서가 대단히 강했던터라, 1951년 팔레비2세는 이를 무마하고자 반서방주의를 표방한 모하마드 모사테크를 총리로 임명했다. 총리가 된 모사데크는 이란의 석유이권을 장악한 서방의 석유회사들을 몰아내고 석유회사를 국유화했다. 이때 영국의 기술자들도 함께 축출됐다. 그러나 석유회사는 국유화되었지만, 이란은 자체적으로 석유를 채굴하고 정제할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더군다나 영국은 강력한 해군을 동원해 해상을 통한 이란의 석유교역을 봉쇄했다. 또한 영국은 이란의 정치인들과 일부 종교지도자들을 매수해가며, 지속적으로 모사데크에 반대하는 세력을 만들고 정치불안을 조성했다. 
한편으로 영국은 이란이 공산화하면 이란의 석유가 소련에 넘어가게 될지 모른다며 미국을 충동질했다. 그리하여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쿠테타를 계획해 모사데크를 축출했다. 이후 다시 복권한 무하마드 팔레비는 이란을 다시 친서방(친미)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73년 4차 중동전쟁으로 인한 오일쇼크로 석유값이 폭등하자 큰 부를 축적했다. 

▲ 1953년 미국 CIA는 이란에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모사테크를 축출했다


그러나 팔레비 2세는 비밀경찰 사바크를 조직해 국가를 철저하게 통제했고, 그 자신이 독일 크루파사의 지분 25%을 소유했을 정도로 부패가 심했다. 더군다나 오일 쇼크로 얻는 막대한 부를 독식하면서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이 때문에 대중들 사이에서 반정부, 반서방·반미 정서가 확산된다. 반서방 정책을 폈던 모사데크의 축출에 미국중앙정보국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란인들 사이에서 반정부·반미 감정이 폭발했다. 1978년 정부의 계엄령선포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학생들·이슬람종교인들’이 합세한 반정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1979년 1월 16일,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됐다. 이것이 이란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친서방 정부가 반미·반서방을 표방하는 이슬람 성직자 중심의 민족주의 정권으로 바뀐 것 뿐이었다. 이란 혁명은 피지배계급의 해방혁명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이때 노동자·대중들은 이슬람종교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을 물리치고 권력을 장악할 만큼 정치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이란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피지배계급을 이끌어 아래로부터 진정한 혁명을 성취할 만큼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호메이니 일당에게 패퇴했다. 
1980년 9월 22일, 이란이 정권교체로 어수선한 틈을 타서 이란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유정을 탐낸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했다. 미국은 이란에서의 석유이권을 되찾으려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부를 지원했다. 이 전쟁이 8년동안 계속됐다. (이후 미국과 이라크가 갈등을 겪는 1·2차 걸프전쟁이 있었다.)

12 차 걸프전쟁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국경지대(양국에 걸쳐 있는)에 있는 루마일라 유전에서 쿠웨이트가 생산하는 석유의 소유권을 가지고 분쟁을 겪었다. 이것을 명분으로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침공했는데, 이것이 제1차 걸프전쟁이다. 미국은 쿠웨이트나 사이디아라비아와 오랫동안 외교적 관계를 공공히 해왔던 터라, 미국은 이라크의 침공에 맞서 쿠웨이트를 지원했다. 미국이 쿠에이트에서의 자신들의 석유이권을 지키는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때 이라크의 사담후세인은 미국이 자신들을 지원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오판이었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이것이 미국이 이라크와 틀러지는 원인이 됐다. 문제는 역시 석유였다.
이후 2001년 잘 알려진 911 테러가 있었다. 사담 후세인이 테러의 배후로 지목됐고, 미국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명분으로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러나 대량살상 무기는 없었다. 미국이 테러와 대량살상무기를 핑계로 이라크의 석유이권을 빼앗으려 했던 것이었다. 이것이 2차 걸프전쟁이다.


호메이니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이란은 말만 공화국이지, 선거로 뽑은 의회와 대통령 위에 성직자로 구성된 율법전문가 회의에서 선출한 종신직인 라흐바르(이슬람최고지도자)가 군림하며, 주요 국정 전반에 대한 광범한 권한을 행사하는 신정정부가 지배하게 된다. 최고지도자 라흐바르는 헌법수호위원회를 통해 인사권을 행사하고,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후보의 자격까지 심사하기 때문에 라흐바르는 선거로 선출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까지도 통제한다. 지금은 라흐바르와 라흐바르가 통제하는 이란혁명수비대가 이란의 석유에 관한 모든 이권을 관리·독점하고 있다. 
이후로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좋지 않다. 이란이 핵개발을 하겠다고 하면서 미국 등 서방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미국 등 서방의 경제제재는 이란 경제를 침체로 몰아갔고, 이란인들의 마음 속에 반미, 반서방 감정을 더 깊게 뿌리내리게 했다. 동시에 신정정부에 대한 반감도 성장했다. 

석유이권을 위한 쟁투의 역사


여기까지 이란의 근·현대사를 개괄적으로 훑어 보았다. 이란의 근ㆍ현대 역사는 석유이권을 쟁탈하려는 영국ㆍ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 세력과, 마찬가지로 석유이권을 독점하려는 ‘팔레비1세나 모사데크, 호메이니’로 대변되는 이란 내 지배계급 사이에 벌어진 쟁투의 역사라고 할 만하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민중의 진출이 있었지만, 권력을 장악할 만큼 정치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란과 영국ㆍ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 국가와의 관계는 이란의 왕조(정권)가 자신들의 보잘 것 없는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과 결탁하고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석유이권을 내어줄 때는 둘 사이의 관계가 좋은 것처럼 보이고, 이란 내 지배계급이 석유이권을 독점하기 위해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석유이권을 박탈하고 그들을 배척하게 되면 관계가 나쁜 것으로 되는 것이었다. 이권을 두고 경쟁하는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관계’라는 것에서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이란의 신정정부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반군,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같은 테러집단들을 지원해 왔다. 그리고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하면서 이들을 견제하고 있다. 이라크에서도 미군은 이란이 지원하는 카타이브 헤즈볼라의 무장공격을 받고 있다.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강한 자본주의 국가, 미국이라고 할지라도 중동에서의 전면전은 무서운 도박이다. 그래서 미국과 이란은 ‘그림자 전쟁’이라 불리는 자잘한 대리전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이 과정에 중국과 러시아가 중동에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거대한 충돌의 잠재적 위험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배계급들은 피지배계급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앗아가고 있다.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처럼 말이다. 이 작자들이 가진 권력을 노동자·민중의 민주적 권력으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이런 어처구니 없고 잔인한 살육의 역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약화되고 있는 미국의 패권, 중동 국가들의 복잡해지고 다변화하는 외교관계

 
최근의 중동국가들과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관계는 이전처럼 단선적이지는 않다. 관계는 다변화되었다. 가장 우선적으로 들 수 있는 이유는 세계 자본주의에서 미국이 가진 패권의 약화이다. 중국이 부상하고, 미국이 중국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면서(여기에 러시아가 중국에 가세하면서) 미국의 중동에서의 패권도 약화되었다. 다음으로는 기술의 발달로 미국에서 셰일가스를 다량 채굴할 수 있게 됨으로써 미국이 에너지 수입국에서 에너지 수출국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미국의 입장에서는 중동(석유자원)의 전략적 위상이 하락했다. 세 번째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이 중동 석유의 최대 수입국을 부상했다는 점이다. 이란과 사우디의 석유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이런 변화들은 중동국가들의 외교관계를 다변화시키고 있다. 이미 2021년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텔레반의 도전을 받아 철수해야 했고, 최근에는 이라크에서 이란의 지원을 받는 카타이브 헤즈볼라의 공격을 받고 있는데, 이라크 정부와 바이든 정부는 이라크에서의 미군 철수를 협의하고 있다. 더 최근의 변화들은 좀 더 크고 근원적?이다. 전통적인 친미 국가인 사우디와 미국 등 서방에서 악의 축이라 불리우는 반미·반서방 국가인 이란이 2023년 8월 나란히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국제기구인 ‘브릭스’에 가입했다. 그전 3월에 앙숙이었던 이란과 사우디 두 나라는 중국 시진핑 정부의 중재로 외교관계를 정상화했다. 
그리고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직전에 사우디는 이스라엘과 국교정상화에 합의하려고 했다. 오랫동안 이슬람국가인 사우디와 시오니즘(유대주의)국가인 이스라엘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이든 정부가 중동에서의 중국세의 성장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두 나라 사이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려고 공을 들였다. 그러나 하마스의 공격으로 사우디가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을 억압했던 이스라엘을 탓하면서 두 나라 사이의 국교정상화 합의는 성사되지 못했다. 일단 합의는 깨졌다. 그러나 여지는 남아 있다. 이번에 이란이 이스라엘에 드론과 미사일을 날려보냈을 때, 사우디는 이스라엘을 방어하는데 협력했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부조차 미국에 완전히 복종하지는 않는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하마스와 헤즈볼라 등과의 전쟁이 필요한 이스라엘의 네타냐후와 미국 유권자들의 압력 때문에 전쟁을 끝내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미국의 바이든 사이에도 미묘한 갈등이 새어 나온다. 어쨌든 이것도 미묘하기는 하지만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고 있는 조짐을 표현한다. 
중동의 정세는 앞을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다. 그러나 전면적인 전쟁이 당장에 현실화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어쨌든 그것은 전쟁 당사자들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상당한 도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계급 등 피지배계급이 정치적으로 성장해 제국주의와 자본가 지배계급에 도전하는 것을 그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특히 중국과 미국 사이의 격화되고 있는 이해관계의 충돌이 임계점을 넘어 군사적 충돌로 나아갈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세계 경제가 점점 더 쇠퇴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중동에서의 긴장이 그 도화선이 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결국 자본주의의 위기가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


최근에 미국에서 대학생들이 반정부·반전 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미국의 가난한 유권자들은 물가인상 때문에 살기가 어렵다며 ‘전쟁을 끝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경쟁과 전쟁은 강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에 약탈당하는 저개발 국가들의 피지배계급만이 아니라, 미국과 같은 강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피지배계급에게도 고통을 가져다 준다.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물가가 치솟고, 거대자본의 투기로 가난한 이들이 빚더미에 오르고,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점점 더 침체하고 있다. 회생의 여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사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점점 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점점 더 몰락해가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는 결국 분노로 떨쳐일어나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