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할 수 없는 현실, 하지만 변화를 꿈꿀 수밖에 없는 현실
뉴욕타임즈 - ‘기생충’은 “계급투쟁에 대한 교훈”을 전하는 영화
영화평론가 이동진 - ‘기생충’은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우화”
하층계급들은 그들이 몸으로 느끼는 현실과는 다르게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는 ‘계급도, 계급투쟁도 없다’고 주입받아왔다. 그런데 이 영화를 평한 뉴욕타임즈나 지식인 평론가는 갑자기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 계급이 존재하고 있고, 계급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봉준호 감독 역시 ‘설국열차’에서도 ‘기생충’에서도 ‘계급’의 존재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솔직하게 자본주의 사회가 ‘지배ㆍ피지배’ 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계급적 분열은 영원하며, 자본가 계급의 지배가 흔들릴 수는 있어도 결코 전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기생충’이 피지배계급에게 전달하려는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가 그렇다하더라도 영화가 신랄하게 그리는 하층계급의 삶을 통해 하층계급이 그 전복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을 완전히 봉쇄하는 것이 가능한가?
현실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되어 있고, 하층계급이 그 계급적 직관을 가지고 있는 한, 그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영화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층계급 관객들은 영화 속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하고, 그 전복의 필요성을 어렴풋하게, 그렇지만 다른 여느 영화에서보다 훨씬 강력하게 느끼게 된다.
불편한 영화는 불편한 현실의 반영
봉준호감독은 ‘기생충’에서 하층계급의 ‘삶과 삶의 조건’을 영화를 보는 이들이 보기 불편할 정도로 치밀하게 묘사한다.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삶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반지하방”의 처절한 삶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어서 불편하다. 살아가기 위해 ‘부자니까 착한거야’라며 부자들을 칭송하는 ‘비굴한 의식’을 무시할 수 없어 불편하다. 생존을 위해 두 가난한 가족이 서로를 죽여야 하는 영화적 상황만일 수 없는 상황, 현실 속에서의 하층계급들 사이의 생존 경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상황 앞에서 더 없이 불편하다. 영화임에도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상황, 영화가 신랄하게 그리는 하층계급의 모습 속에서 하층계급 관객들은 결코 객관화시킬 수 없는 자신의 삶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불편하다. 속이 부대끼고, 숨이 막힌다. 영화가 불편한 것은 현실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층계급의 무의식적 계급의식을 반영한다. 물론 영화는 이런 계급의식이 의식된 의식으로 발전하도록 배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계급적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하층계급의 의식을 그들 맘대로 지배하는 것이 가능한가?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는 지배계급의 강력한 의지로도 어찌해볼 수 없는 피지배계급의 의식이 싹트고 발전하기 마련이다. 하층계급들을 생존의 전장으로 내모는 현실이 그렇게 만든다.
어떻게? 그것이 문제일 뿐!
영화의 말미에서 반지하방의 ‘기우’는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도 포기하고 부자가 사는 대저택을 사기로 맘먹는다. 그래서 지긋지긋한 반지하방의 생활에서 탈출하고 대저택의 지하에 갇힌 아버지를 구출할 꿈을 꾼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조차 그것은 가능한 꿈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환상’일 뿐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감독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지만, 무엇보다 현실 그 자체의 반영이기도 하다. 하층계급의 꿈 많은 청춘들조차 그것이 가능하리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 계급의 장벽은 대단히 높고 그래서 계급상승은 꿈도 꿀 수 없다. 봉준호와 지배계급은 결론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결국 계급지배는 영원하리라는 결론 말고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하층계급은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다.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어떻게든 바꿔야만 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난 하층계급 관객들의 결론은 봉준호감독과 이를 칭송하는 아카데미를 비롯한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기대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세상은 전복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문제로 남을 뿐이다.
김정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