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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임금론 ― 연대도 없고, 임금도 없다

noheflag 2020. 7. 8. 12:26

▲ 6월 18일(목)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2차 노사정 대표자회의 참석자들. 이날 김동명 한국노총위원장은 '정규직의 임금인상분 등으로 사회연대기금을 조성해, 비정규직을 직접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최근 노사정 대표자회의에서 한국노총 위원장은 ‘올해 임금인상분 등으로 사회연대기금을 조성해, 비정규직을 직접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하자’고 노사정 대표자회의에 제안했다. 정규직 임금을 동결하고 비정규직 처우개선하자는 연대임금론이다.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도 이 내용이 포함된 노사정합의안에 동의해줬다.  

연대임금론 

연대임금론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임금을 양보하거나 세금, 복지 비용 부담을 늘리고, 이러한 양보를 통해 일자리 늘리기, 비정규직 처우 개선, 복지 확대 등을 만들자는 것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미조직 노동자들을 위해 연대해야 하는데, 이를 임금양보를 통해 하자고 한다. 정규직노조가 선제적으로 임금을 동결하고 이 재원을 포함해 사회적 연대기금을 조성하자고 정부와 자본을 압박·견인하면, 미조직 취약계층 노동자의 사회안전망 확충 등 여러 보호 조치를 강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연대임금론은 선한 의도를 담고 있어 보인다. 그러나 선한 의도가 꼭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연대임금론이 주장하듯 정규직 노동자가 먼저 양보하면 자본을 압박하는 사회적 여론이 생겨나고 열악한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질까?


임금 없는 연대임금 

정규직이 양보한 임금으로 비정규직, 미조직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나아지는가? 꼭 그렇지 않다. 
연대기금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데 쓰이는 경우가 드물다. 비정규직의 임금을 대폭 인상하지도 못한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없애려면 비정규직을 직접고용하면 된다. 이는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자본은 비정규직을 위한다는 생색을 낼 수 있다.
연대임금의 사례로 주로 언급되는 SK이노베이션은 노동자 기본급 1% 기부와 회사가 출연한 1% 행복나눔 기금에 정부 및 협력사 공동근로복지기금 출연금을 모아 상생기금을 조성했다. 이 기금으로 올해 1월 29억 6,000만원을 협력업체(하청 등) 6,819명에게 지원했다. 1인당 43만원 꼴이다. 이에 비해 SK이노베이션은 2019년 영업이익 1조 2,693억 원을 기록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지 않으면서 더 큰 이윤을 얻고, 상생기금 일부를 사용하여 ‘좋은’ 기업이라는 생색을 낸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2018년 금속노조는 하후상박 임금인상을 목표로 삼았다. 정규직 임금인상을 적게 하고 비정규직, 부품사 임금인상을 높이자는 것이다. 금속노조 전체 임금인상 요구인 7.4%(146,746원)에서 현대기아차 지부는 5.3%(116,276원) 인상하고, 나머지 2.1%(30,470원) 인상분은 부품사와 비정규직 임금인상에 반영하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교섭을 통해 2018년 현대·기아차는 45,000원을 인상(2017년 58,000원 인상)하고 이외 115개 중소사업장은 평균 56,106원이 인상됐을 뿐이다. 11,106원의 임금 격차를 줄였다고 하지만 하후상박 임금인상의 성과로 보기에 미흡하다(2018년 대비 2019년 최저임금은 171,380원 인상됨). 비록 중소사업장 임금이 조금 더 오르기는 했지만, 전체 임금인상액이 낮아지는 하향평준화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임금 인상의 지름길 – 최저임금 인상 

열악한 노동자들의 임금을 높이려면 임금양보가 아니라 최저임금 인상을 위한 투쟁에 힘쓰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비정규직, 미조직 노동자들의 임금인상과 임금격차 축소는 실제로 최저임금 인상으로 가능하다. 2018년 최저임금이 16.4% 인상됨에 따라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의 70% 수준까지 올랐다.(2017년 대비 2018년 시급 1,060원, 월급 221,540원 인상) 저임금근로자 비중도 조사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20% 아래로 떨어졌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위한 투쟁에 정규직노조가 함께하고 힘을 싣는 것이 임금 양보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정규직이 낮은 임금의 주범인가? 

연대임금론은 ‘귀족노조, 집단이기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기보다 그 내용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대응하는데 근본적 한계가 있다. 많은 노동자들이 고용불안과 저임금의 고통에 놓인 이유는 무엇인가? 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이 가져가서인가? 아니면 1%의 자본가들이 부를 독점해서인가? 재벌들의 사내유보금은 1,000조원을 넘어서고 있다. 한국 사회 1%가 전체 자산의 25.9%, 상위 10%가 자산의 66% 가량을 소유한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바꾸려면 연봉 7,000-8,000만원 받는 정규직이 아니라 100억, 1,000억을 벌어가는 재벌과 자본가들에게 양보를 요구해야 한다. 
그런데 가진 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양보를 요구하기보다 정규직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미조직 노동자의 낮은 임금의 책임을 묻는 방식이기 때문에, 연대임금론은 귀족노조 이데올로기를  막아내지 못한다. 오히려 강화시키기까지 한다. 많은 노동자의 어려운 상황이 좋은 조건을 누려온 정규직 탓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확대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분열을 막으려는 선한 의도가 오히려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의 골을 넓힐 수 있다.


연대 없는 연대임금론 

결정적으로 연대임금론은 노동자들의 자본에 맞선 단결력과 투쟁력을 높이기보다는 노사협조주의를 확대하고 수동성을 강화한다. 연대임금론에 따르면 비정규직, 미조직 노동자들은 정규직의 양보로 이득을 얻어야 하는 시혜의 대상이 된다. 특히 비정규직, 미조직 노동자들이 스스로 뭉치고, 투쟁하여 자신의 권리를 찾기 보다는 정규직노조의 교섭에 기대며 수동화된다. 비정규직, 미조직 노동자들을 주체로서 조직화하는데 소극적이며, 임금양보로 연대를 얘기하는 것이 제대로 된 연대인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전환 투쟁을 방해하면서 임금 양보로 ‘연대’를 생색내는 경우도 있어 연대임금론이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진짜 연대 

비정규직을 확대하고 저임금 노동을 강요하는 것은 자본가들이다. 노동자를 고용형태에 따라, 공장 담벼락에 따라 분열시키고 단결하지 못하게 하는 것 또한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분열을 이용해 더 많은 이윤을 얻는다. 정규직 노조가 조합주의에 갇혀있는 한계는 있지만 근본적 원인을 잊어선 안 된다. 
정규직, 대기업 노조가 조합원만의 이익을 중시하며 연대에 소극적인 것에 대한 문제제기는  타당하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구호가 구호로만 존재하고 현장에서는 비정규직과의 차별이 계속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차별을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노동자가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그 역할을 상대적으로 힘을 가진 대기업, 정규직노조가 주도적으로 해야 하는데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 현재의 문제이다. 
결국 쟁점은 연대임금론, 정규직 임금양보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강한 단결력과 투쟁력을 가진 힘 있는 조직노동자들이 그 힘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쓸 것인가이다. 그런데 연대임금론은 본질적 쟁점을 흐리고 계급적 단결을 강화하지 못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의 임금 양보가 아니라 계급적 단결과 연대를 더 원한다. ‘우리만 살자’가 아니라 ‘함께 살자’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연대다!

 

진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