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되는 조선산업 구조조정
카타르발 축포의 초라한 진실
6월 1일 카타르 페트롤리엄(QP, 카타르 국영석유회사)이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과 100척 이상의 LNG운반선 슬롯을 예약했다. 6월 12일 토탈(Total, 프랑스 에너지기업)사도 모잠비크 프로젝트에 투입될 LNG운반선을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과 슬롯예약(약 16척) 했다. 수주난에 시달리던 조선사로서는 QP와 토탈의 슬롯예약은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요란한 축포는 오래가지 못했다. 카타르발 대형 발주는 빨라야 올해 말부터 시작되어 2027년까지 순차적으로 나온다. 실재 건조에 들어가는 시기는 2022년경이 될 것이다. 또한, 이를 3사(현대삼호중공업을 포함하면 4사)가 나누게 되면 많아야 수주목표의 20%정도를 채우게 된다.
LNG(LPG 포함한 가스운반선)운반선만으로 물량을 채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발주되는 대부분의 LNG운반선을 수주한다해도 2021년, 2022년 물량을 채우기 위해선 다른 선종(컨테이너선, 탱커, 벌크선 등)의 수주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조선소 생산현장에선 벌써부터 물량부족의 전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선주사들은 인도를 연기하고 있고 조선사들은 내년부터 부족해지는 물량에 대비하기 위해 생산스케줄을 늘이고 있다. 하청업체들은 수시로 무급휴업을 시행하고 원청에 의한 업체 통폐합(통폐합과정에서 일정한 수의 노동자도 정리된다)도 수시로 이뤄지고 있다.
배는 커지고 물동량은 줄고
과잉생산은 해운업에서 바로 나타난다. 지난 4월 문재인대통령이 거제까지 내려가 명명식을 한 HMM의 알헤시라스호는 2만 4천개의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는 세계 최대의 컨테이너선이다. HMM은 24,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올해 안에 12척, 내년에 8척 총 20척 인도받는다. 이처럼 대형해운업체들은 초대형 선박으로 선대를 구성하고 있다. 컨테이너선만이 아니라 유조선, 벌크선 등도 초대형 선박들이 속속 항로에 투입되고 있다.
문제는 그만큼 물동량 증가률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궁여지책으로 임시결항, 노선감축, 심지어 폐선도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물량을 채우지 못해 운항을 하지 않는 유휴선박은 늘어나고 있다. 5월말기준 세계 컨테이너선사들의 평균 유휴선박비율은 11.6%다. HMM은 32.9%로 가장 높은 유휴률을 기록했다. 2020년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물동량감소가 가장 클 것으로 보인다. 세계경제가 살아나지 않는 이상 이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지속되는 전 세계 조선산업 재편
장기불황, 미·중무역전쟁,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전 세계 조선산업 재편은 가속화되고 있다. 이미 중국의 거대 국영조선업체인 중국선박공업(CSSC)와 중국선박중공(CSIC)이 합병했고, 일본의 이마바리조선과 JMU(Japan Marin United)는 합병단계에 들어가 있다. 일본은 국가주도로 주요 조선소 15개를 모두 통합하겠다는 계획으로 강력한 조선업 구조조정을 추진 중이다. 해양플랜트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국인 싱가포르의 셈코프마린(Sembcorp Marine)과 케펠(Keppel)의 합병이 국영투자사인 테마섹(Temasek)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외에도 독일의 3개 조선사가 합병 협상을 진행 중이고, 크루즈조선사인 이탈리아의 핀칸티에리(Fincantieri)와 프랑스의 아틀란틱조선(Chantier de‛l Atlantique, 전 STX 프랑스)이 EU의 기업결합심사를 받고 있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겠다는 각국 정부와 자본가들의 고육지책은 자본주의 경제가 결국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지 잘 보여준다. 장기불황과 과잉생산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 경제법칙에선 중소규모 자본을 무너뜨리고 살아남은 자본만이 더욱 몸집을 불리며 또다시 치열한 경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다시 부는 구조조정 바람
코로나19가 진정되지 않으면서 세계 경제는 극도로 침체하고 있다.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조선업도 영향을 받고 있다. 이미 2016년부터 본격화된 구조조정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또다시 구조조정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의 해양플랜트 인력이 대거 사라질 것이란 전망은 현실이 되었다. 대우조선해양은 3천명 이상의 하청노동자들이 떠났고 정규직까지 전환배치가 거의 마무리 되었다. 9월쯤이면 삼성중공업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양사를 합쳐 많게는 1만 명에 달하는 하청노동자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현대중공업은 7월 1일부로 20%의 임원감축과 부서통폐합이 이뤄졌다. 아직은 희망퇴직 등의 인위적 감원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고 있지만 사측이 언제든 들고 나올 것이란 우려가 팽배하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합병은 또 다른 복병이다. 중국과 일본은 기술이전을 조건으로 승인해주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EU는 선가 상승을 막기 위해 LNG, LPG 운반선의 독과점 문제를 집중적으로 심사하겠다며 벼르고 있다. 이제는 정부조차 조건부승인과 불승인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인정하고 있다. 합병이 어떻게 결정되든 구조조정은 불가피해 보인다.
기계를 파괴할 것인가 자본가와 싸울 것인가
경기침체 → 해상물동량감소 → 선박발주감소 → 구조조정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LNG 운반선에서 경쟁력을 보여주고 있는 한국조선업이지만 생산능력에 비해 수주량은 턱없이 부족해지고 있다.
하지만, 조선업 자본가들이 어려움에 처한 것은 아니다. 1, 2년의 시차가 있는 발주산업의 특성상 당장 수주가 안 된다고 해서 매출의 급격한 하락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언제든 해고와 고용이 자유로운 하청노동자가 다수인 조선업에선 물량에 따라 인력운용이 너무나 쉽다. 즉, 조선업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손실을 최소화하고 있다. 정규직은 각사로 분열되어 있고 하청노동자들은 조직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책임전가가 손쉽다.
노동자들이 조선산업의 재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여주기식 집회가 아니라 실질적인 공동의 투쟁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중소조선소의 노동조합들이 각 사별로 따로 싸우면서 힘은 분산되고 하나씩 무너져 갔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
조만간 합병문제가 마무리될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노동자들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200여 년 전 기계가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자본가가 아닌 기계를 파괴했던 노동자들이 있었다. 인수합병이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이를 반대한다고 구조조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구조조정의 핵심인 노동자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중심으로 싸운다면 하청노동자를 조직하고 소속과 지역을 넘어 함께 싸우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윤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