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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사와 실업이 공존하는 세상, 무엇이 문제인가?

noheflag 2020. 11. 11. 19:20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 (2020.7.28.) (출처 :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

 

최근 5년간 매년 평균 15명의 집배원이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택배 노동자 역시 올해에만 벌써 10명이 과로로 사망했다. 지난 10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뇌심혈관계질병으로 사망(과로사)해 산업재해를 신청한 노동자가 3천여 명에 달한다. 고용노동통계를 보더라도 2017년에만 뇌·심혈관 질환으로 노동자 354명이 일하다 갑자기 숨졌고, 44명이 업무상 사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해 평균 4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과로로 죽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장시간 노동

택배노동자들의 주당 노동시간은 71.3시간에 이른다. 그런데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건 택배노동자들뿐만이 아니다. 게임회사 등 IT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코로나로 인해 더욱 장시간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보건의료노동자들, 버스 등 운송업 노동자들, 미용업계를 비롯한 서비스직 노동자들 등 다양한 직군의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생산직이라고 다르지 않다. 2017년에 진행된 ‘한국근로환경조사’에 따르면 10인 미만 사업장의 절반 이상이, 10~49인 사업장의 36%가 주 45시간 이상 일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규모 사업장도 특별연장근로, 탄력근로제 등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여 주52시간을 훌쩍 넘겨 60시간 이상 근무를 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정부는 최근 코로나를 핑계로 연간 90일까지 허용되는 특별연장근로를 하반기에도 90일 더 쓸 수 있게 하여 연간 총 180일간 연장근로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현재 ‘4주 연속 64시간, 12주 연속 60시간 근로한 경우’ 과로사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 이 기준을 넘어선 것이다. 사무직이나 공무원들의 경우에는 주52시간을 넘기지 않기 위해 퇴근 처리 후 무급으로 초과노동을 시키는 경우도 많다. 주40시간 노동제가 시행된 지 16년이 지났지만 2020년 현재에도 장시간 노동은 계속되고 있다.  

넘쳐나는 실업자들


장시간노동을 강요하는 그 반대편에는 엄청난 수의 실업이 존재하고 있다. 올해 9월 기준으로 실업자 수가 100만 명에 달한다. 비경제활동인구 중 ‘쉬었음’으로 분류된 사람은 241만 3000명으로 통계 작성 이후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특히 통계상 취업자로 분류되지만 쉬고 있는 상태인 ‘일시휴직자’ 역시 78만9000명이나 된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장기휴업으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항공사승무원이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한쪽에서는 장시간 노동과 높은 노동강도로 인해 과로로 죽어나가고, 다른 쪽에서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강요된 나태’로 생계의 어려움을 겪는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얼마나 모순된 상황인가!

노동강도는 낮추고 노동시간은 줄이고!


과로사를 막는 방법은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노동강도를 낮추고 노동시간을 줄이면 될 일이다. 법적기준인 주40시간 노동만 제대로 지켜도 노동자들이 과로로 죽어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용은 늘고 실업은 줄어들 것이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자본가들만 빼고 말이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내려는 자본가들만이 노동시간 단축, 일자리나누기에 반대한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목숨보다 자신들의 이윤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일자리 나누기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은 적은 임금을 주고 더 오래 더 많이 일을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 
지난 10월 12일 쿠팡에서 일하던 27세 노동자가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인을 두고 사측에서는 과로사가 아니라고 부인했다. 지난 3개월간 주 44시간 정도 일을 했고, 업무도 빈 종이박스나 비닐 등을 옮기는 쉬운 노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휴가가 보장되어 있는데 본인이 쓰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노동자는 지난 7월부터 사망 전까지 일주일에 5~6일을 야간근무를 했고, 4주 이상은 주당 60시간 이상의 노동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추석 때도 쉬지 못하고 일을 했다. 상황이 이런데 서류상 보장된 휴가가 무슨 소용인가? 이 노동자의 업무 역시 사측의 주장과 달리 물류센터에서 운송기계로 물건을 옮겨 배분하는 일을 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처럼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하고 모든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면서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고 있다.

생활임금이 보장되어야 한다

또한 장시간 노동을 줄이기 위해서는 생활임금쟁취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장시간 노동이 강제되는 많은 사업장들은 장시간 노동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조건인 경우가 많다. 소규모 사업장, 최저임금 사업장들의 경우 잔업과 특근, 휴일 및 야간 근무 등을 해야 먹고 살 정도의 임금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보니 노동자들이 나서서 추가근무를 원하는 경우도 생겨난다.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일할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40시간 노동을 하더라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생활임금이 보장되어야 실제로 장시간 노동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과거 주40시간 쟁취를 위한 투쟁에서, 그리고 주간연속 2교대제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구 중의 하나가 ‘임금삭감 없는’이라는 전제조건이었다. 임금보전이 안 된 채 도입된 주5일 근무제로 노동자들의 임금은 줄어든 반면 일은 더 빡세졌다. 결국 노동자들은 줄어든 임금을 보전받기 위해 더 높아진 노동강도에 잔업 특근까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장시간 노동으로 임금의 양을 맞추거나 높이는 방식이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근본적인 문제


노동자들의 과로사는 ‘갑작스런 물량 증가’, ‘코로나로 인한 특수 상황’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자체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확대하는 것이 목적이다. 노동시간을 늘이거나 노동강도를 높여 더 많이 생산해야 이윤이 확대될 수 있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들을 더욱 착취할 방법을 강구해낸다. 임금을 더 하락시키기 위한 자본가들의 욕망은 파견, 용역, 시간제, 일당제 노동자들과 특수고용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등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 불안정 노동을 확대했다. 또한 기존의 정규직 일자리도 비정규직 일자리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실업자들을 확대 양산하여 이들을 통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기고 임금수준을 하락시킨다. 노동자들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려 하지만 옮겨가는 일자리는 점점 더 열악해질 뿐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세상을 바꾸지 않는 한 취업노동자들에게는 더 긴 노동시간과 높은 노동강도가 강요되고, 실업노동자들은 생계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비참한 처지로 내몰리는 상황은 계속된다. 자본가들이 이윤을 끌어모으며 노동자들 위에 군림하는 동안 전체 노동자계급의 삶과 처지는 더욱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를 비롯한 많은 정부들이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해줄 것처럼 떠벌리고 실업문제를 해소하겠다며 대책을 내놓지만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제대로 된 해결은 불가능하다. 임노동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임노동 관계를 ‘철폐’하지 않고서는 노동자계급의 처지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변화를 만드는 힘

노동자들의 처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자들의 단결뿐이다. 노동자들끼리 경쟁하지 않는다면,  장시간 노동과 높은 노동강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본가들은 한 줌의 이윤도 가져갈 수 없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노예같은 삶은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으로만 멈춰 세울 수 있다. 자본가들에게 구걸하거나 자본가들의 시혜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통해 계급적 우위에 설 때 비로소 노동자계급의 처지는 변할 수 있다. 


권보연